[천자춘추] 십 남매의 추억

얼마 전 TV에서 10남매 가족을 소개한 일이 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사는 모습을 보니 넉넉지 않은 모습인데 아이들 교육비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남 일 같지 않다. 이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10남매가 시골에서 살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8~9남매를 낳은 것은 보통이었기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형제가 많다고 해도 결혼을 해서 떠난 사람, 서울로 유학 간 형님, 직장 생활을 하려고 타지로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 6~7명이 함께 살았다. 시골 생활이 다 그러하듯이 손 하나라도 있으면 일이 수월하기에 어머니는 일터로 나가시고 집에 있는 누나들이 동생들을 돌보다가 시집을 가곤 했다.

첫째 누님이 19살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다음 해인 1955년에 필자를 낳으셨다. 이듬해 사위가 왔을 때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으셨다고 한다. 큰 누님은 그 다음 해 큰아들을 낳고 연달아 둘째 아들을 낳았다.

큰 누님이 시집간 후 집안 살림은 둘째 누님의 몫이 되었다. 늦게 낳은 막냇동생도 돌봐야 했다. 둘째 누님은 1957년에 시집을 가서 이듬해 봄에 큰딸을 낳았다. 어머니는 그해 12월에 열 번째 막내딸을 낳았다. 둘째 누님이 시집을 간 후에는 셋째 누님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둘째 누님부터 셋째, 넷째, 다섯째 누님 순으로 바통이 넘겨지면서 누님들의 손에 자랐다.

그중에서 다섯째 누님과의 생활이 가장 길었다. 누님은 솜씨가 좋아서 무슨 일이든지 척척 잘했다. 농사일이며, 음식솜씨 또한 수준급이었다. 특히 누나는 찐빵을 잘 빚었다. 여름이면 팥소를 넣어 만든 찐빵을 뚝딱 한 가마솥 쪄서는 한판 파티를 벌이곤 했다.

이 시절 우리 가족은 행복했다. 누나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가곡을 부르곤 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절 우리 가족들은 쏟아지는 별을 보며 추억을 만들곤 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하자 이번에는 큰딸에게 맡기셨다. 큰 누님에게는 고등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결혼할 때까지 신세를 지게 되었다. 큰 누님은 아들 다섯을 낳아서 막냇동생까지 아들 여섯을 길러야 했다.

몇 년 전 2.1 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분이 계셨다. 어떤 뜻이 있느냐는 질문에 부부가 2.1명을 낳아야 적정한 인구가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바 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2.1명을 낳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관련 제도와 정책을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세 자녀는 낳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충영 수원시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