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광화문은 거기 있었다

목덜미를 파고들며 얄궂게 굴던 꽃샘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새벽에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풀내음에선 봄 향이 짙다. 하루가 다르게 툭툭 터뜨리는 꽃 행렬은 일터로 나가는 발길을 흔들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력으로 축복받은 계절이건만 한국의 4월은 장엄하다.

계엄령, 유혈, 부패를 떠올리는 4·19혁명이 올해로 53주년이다. 그해 4월도 이처럼 아름다웠으련만. 돌멩이 하나에서 풀잎에 이르기까지 봄볕은 지금처럼 충만했을 텐데 4월의 광장은 젊음 불태운 피비린내의 우수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2년 전 이맘때쯤으로 기억된다. 故 이영훈 작곡가를 추모하기 위한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보았다. 공연을 보러 가는 내내 덕수궁 돌담길과 광화문 광장의 달콤한 아이스크림빛깔 연가를 상상했었다.

그러나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국가의 부패에 맞선 젊은이들의 죽음과 고문을 소름끼치는 전율로 풀어냈다. 극은 민주화라는 큰 틀 안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노래에 담고 시대의 아픔과 사랑을 버무려 하나의 긴 이야기로 녹여냈다.

극 중 현우와 상훈이(故이영훈의 캐릭터, 윤도현분)는 의리로 다진 선후배 사이로 여주라는 한 여자를 두고 삼각관계에 놓인다. 후배 현우는 친형 같은 상훈이가 여주를 맘에 두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여주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상훈이는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위해 먼 길을 떠난다.

현우는 여주에게 끌리는 사랑의 감정 이외의 모든 면에서 상훈이에겐 충성을 다하는 후배이다.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민중가요 작곡가인 상훈이를 보호하기 위해 죽을 만큼 매를 맞으면서도 상훈을 숨겨준다. 광화문은 민주화를 위한 두 청년의 우정을 죽을 각오로 몰매를 맞거나 평생 가슴앓이의 사랑을 포기하는 의리로 거듭나게 했다.

여고 때 떡볶이집을 찾아 철없이 누비고 다닐 땐 광화문의 아픔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공연을 본 후 다시 보니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속으로 삭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숙연해졌다.

엊그제 세미나가 있어 시청역에 갔다가 사랑스럽게 떨어지는 벚꽃에 밀려 광화문까지 걷게 됐다. 민주화 운동의 광장으로, 연인들의 거리로, 국가 대소사의 중심지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광화문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이 미 숙 (사)한국미디어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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