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명예의전당 헌액 '전설의 프로복서', 유명우

"프로복싱 침체 안타까워…새로운 간판스타 키울것"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

1980년대 한국 복싱팬들의 가슴을 방망이질 해댔던 한국형 ‘무하마드 알리’, ‘작은 들소’, ‘작은 악마’ 유명우(48).

한국 프로복싱 역사상 최다 세계 타이틀 방어 성공(17차)에 최장수 챔피언 벨트를 유지, 가장 많은 대전료….

한국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이끌며 아직도 올드 복싱팬들의 뇌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전 세계권투협회(WBA) 유명우씨에겐 항상 ‘최고’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강철같은 체력을 앞세운 저돌적인 인파이터였던 그는 좌우 콤비네이션 블로의 일인자로 복싱팬들의 가슴을 방망이질해 댔다.

특히 부와 명예를 거머쥔 뒤에도 한 눈 팔지 않고 훈련에만 집중, 경기를 치를수록 기량이 진보한 대표적인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그가 최근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헌액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장정구에 이은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이자 동양인으로는 5번째다.

주말 저녁, 황금 시간대에 온 국민을 TV 앞에서 웃고 울게 한 복식영웅, 유명씨를 지난 20일 수원시체육회관 복싱장에서 만났다.

-지난 1980년대 후반 세계 복싱계를 평정했던 무쇠 주먹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곱다. 맞지 않고 선수생활 한 것은 아닌가.

▲체구가 작아 동안으로 보이는 것뿐이다. 요즘엔 늙어보인다는 사람도 많다. 프로 선수생활만 10년차인데 맞지 않고 어떻게 싸우나(웃음). 39전의 경기를 치르며 기라성같은 상대와 맞서 싸우면서 생긴 노하우는 최대한 정(正)타를 안 맞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복싱에 입문한 계기는.

▲공부를 못하니 운동을 택한 것 같다(웃음). 학교에 친구가 글러브를 갖고 와서 어린 마음에 생애 첫 스파링을 가졌다. 주위에서 “권투선수 하면 잘 하겠다”는 칭찬의 말 한마디에 부모님 몰래 돈 모아 서울 관악구 대원체육관(관장 김진길)에 등록했다. 함께 운동한 나이 지긋한 어른 동료(?)가 까까머리 꼬마 초년병에게 힘을 불어넣어 줘 권투에 폭 빠지게 됐다.

-벌써 은퇴한 지 20년이 흘렀지만 ‘영원한 챔피언’으로 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챔피언 시절은 어땠나.

▲1980년대엔 프로복싱이 인기 스포츠였다. TV 앞에서 온 국민이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관람하던 때였다. 그만큼 큰 인기를 누린 때라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챔피언 시절의 영광과 팬들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금도 따라다닌다. 후배들에게 옛 복싱의 영광을 다시 안겨주고 싶다.

-국내 최다 17차 세계 타이틀 방어라는 경이적인 기록의 소유자다. 경량급에서 롱런한 비결은.

▲시합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지 않으면 링 위에서 그만큼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 생존경쟁에서 나를 대신해 링 위로 올라갈 ‘대안’은 없다는 것이 18살의 어린 나이에도 명확히 각인됐었다. 그래서 챔피언 시절 내내 ‘초심을 잃지 말자’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꾸준한 운동으로 인내심을 갖고 체중감량에 올인해 주니어플라이급으로 롱런할 수 있었다. 20차 방어전을 목표로 세웠는데 아쉽게 18차에서 깨졌다.

-17차 방어전까지 국내에서만 경기를 치뤄 ‘우물안 개구리’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유가 있는가.

▲서양인은 체구와 골격이 커 경량급이 별로 없다. 남미 쪽은 높은 개런티를 주고 시합을 열 수 있는 여건이 못 됐고, 동남아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그나마 가장 대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한국으로 원정경기를 더 선호했다. 그러다보니 비교적 경제여건이 나은 국내에서 경기를 많이 치뤘다. ‘우물 안 개구리’ 라는 비난은 억울하다.

-프로통산 전적 39전 38승 1패를 기록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지난 1985년 12월 조이 올리보(미국)와 첫 세계 타이틀매치가 기억에 남는다.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았을 때,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1차 방어전 당시 12라운드에서 귀를 맞았는데, 윙~ 소리가 나면서 치명타를 입은 걸 직감했다. 시합 후 고막이 터진 것을 알았다. 아픔보다는 독기가 뻗쳤다. 더 강해지려 악착같이 노력했다.

-18차 방어전을 일본 원정으로 치뤄 타이틀 뺏긴 뒤, 1년 만에 되찾아 왔다. 그런데 이듬해 돌연 은퇴한 이유는.

▲20차 방어전을 성공하는게 목표였는데 돌이켜보니 욕심이 컸다. 지면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고, 18차 방어전을 패한 뒤 은퇴를 생각했지만 패하고 링을 떠난다면 여태까지 챔피언을 지키기 위한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4~5개월 고민 끝에 다시 하기로 결론을 내렸고, 다시 타이틀을 되찾았다. 이후 목표가 사라져 명예롭게 은퇴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체급에 세계복싱평의회(WBC) 세계챔피언인 장정구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다. 장 선수와의 통합타이틀전을 기대한 팬들이 많았는데,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장정구 선수나 나에게 통합타이틀은 정말로 매력적인 시합이다. 영광스런 대전을 어느 선수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매니저와 프로모터 또 각 방송사 간 여건 때문에 성사되지 못해 아쉬웠다.

-국제 복싱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소감은.

▲무하마드 알리, 마이크 타이슨, 조지 포먼 등 세계적인 많은 복싱스타와 복싱 관계자들이 이름을 올린 ‘복싱인의 로망’ 명예의 전당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감회가 새로웠다. 장정구 선수에 이어 국내에서만 2명의 헌액자가 배출된 것은 국제적 자랑거리다. 내년 6월 6~9일까지 나흘간 미국 뉴욕주 캐너스토타에 있는 복싱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서 열릴 헌액식에 초청, 핸드프린팅 및 헌액 반지 등을 받을 예정이다.

-은퇴 후 수원서 오리고기 전문 음식점을 운영, 사업가로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나는 영원한 복싱인이다. 사업가란 말은 어색하다. 조그만 장사를 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일을 해도 복싱과 관련된 일을 해야지만 제일 즐겁고 행복하다. 내 고향은 영원히 ‘복싱’이다. 난 음식점에서도 카운터에 앉아있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 것이 내 역할이다. 옛 챔피언이라고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고, 같이 인증샷을 요구하는 고객과 즐겁게 사진도 찍고 격려도 받아 행복하다.

-사업가에서 복싱계로 다시 돌아와 프로모터 등을 하고 있는데 계기는.

▲국내 프로복싱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인기있는 스포츠로 유지되고 있었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프로복싱이) 바닥으로 추락할 정도로 침체해 있다. 꿈을 가진 후배들의 희망이 없어지는 것 같아 권투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볼 수만 없었다.

-국내 복싱계 침체 원인과 돌파구를 제안해 달라.

▲예전의 명성에만 집착해선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다. 일본만 해도 침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돌파구를 모색해 지금은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세계챔피언 5명을 보유하고 있는 복싱 강국으로 일어섰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나를 포함한 모두의 잘못이다. 늦었을 때가 가장 이른 것이란 명언을 되새겨 지금부터라도 먼 훗날의 영광을 위해 힘을 모아 서서히 준비해야 한다. 복싱인들의 노력과 땀방울이 모아져야만 프로복싱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팬들과 제2의 유명우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출전한 시합을 관람하시다가 흥분하셔서 돌아가신 어르신 팬이 계시다. 언론보도를 통해 그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고인의 명복을 빌며 속으로 울었다. 그만큼 나를 열성적으로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팬들이 있기에 링 위에서 두려움이 없었다. 이런 사랑의 스폰서가 선수들의 꿈과 희망을 키운다. 권투의 부흥기를 이끌 신세대 복서들을 배출하려면 좋은 시합이 많이 열려야 한다. 요즘엔 ‘여우(여자배우) 복서’ 이시영의 인기로 생활체육으로서 복싱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긍정적인 일이다. 복싱계의 새로운 간판스타를 키우는 데 주력하겠다.

대담=황선학 지역사회부장 2hwangpo@kyeonggi.com  

정리=권소영기자 ksy@kyeonggi.com

사진=추상철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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