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전과(全科) 한권의 추억

초등학교 4학년 초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무심히 교실 책상 사이를 지나가는데 뭔가 눈부신 광채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게 뭘까?’ 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하얀 바탕의 책자위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네 글자 ‘○○전과(全科)’였다.

학교에서 교과서만 뒤적이던 내게 전과, 즉 참고서가 있다는 사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만큼의 일대 사건이었다. 친구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로 나열되어있는 신지식의 보고(寶庫). 왠지 따분하고 건조하게 느껴지는 교과서와는 달리 중요한 대목은 별도의 단락으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고, 교과서를 능가하는 편집과 연습문제 종합문제 등. ‘아 전과만 가질 수 있다면 교과서의 모든 내용을 내 머릿속에 전부 집어넣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자 눈부신 광채는 교실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몇몇의 아이들이 전과를 구입한 것이다. 며칠 후 나는 학교 앞 문방구 주인아저씨와 마주 서 있었다.

 

“아저씨, 아버지가 출장 중이신데 며칠 뒤에 돈 드릴 테니까 전과 좀 미리 가져가면 안 될까요?” 주인아저씨가 약간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쳐다봤지만 내가 이빨을 보이며 순진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책을 내어주었다.

그날부터 난 그 전과를 닳도록 보고 또 봤다. 하지만 난 끝내 아버지에게 전과를 사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정도 지났을까?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열심히 공을 차고 있는데 친구들이 나를 불렀다. “저기 아저씨가 너 찾어.” 고개를 돌려보니 교문 앞에 문방구아저씨가 서 있었다.

석양을 등진 아저씨의 긴 그림자가 내 발 앞에 와 있는 듯 느껴졌다. 나는 알았다. 내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교실로 들어가 전과를 들고 나왔다. 일주일새 내가 본 페이지는 표나게 손때가 묻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책값을 마련 못했어요….” “아버지는 출장갔다 오셨니?” “그게….”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문방구 아저씨는 책을 받아들더니 “책을 돌려받았으니 괜찮다” 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날 유난히 빨간 석양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전과에 대한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비록 전과는 사주지 못하시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분이 너무 보고 싶어 달음박질치며 집까지 뛰어 갔다. 그날 석양속의 태양은 내가 본 태양 중 가장 컸다.

함진규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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