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무·스트레스 시달리는 현대인 ‘자기 착취’의 직장문화 바뀌어야
S형. 지난주에 내린 첫 장맛비가 호우경보로 이어지고 말았어요. 오랜 가뭄 뒤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맛비를 보면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차고 넘치는 것도 문제라고요. 그날 자정, 시청 로비가 갑자기 불어난 직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어요. 혹은 자다일어나 나왔을 테고, 혹은 술 한 잔 하다가 호우대비 비상근무에 임하라는 문자를 받았겠지요. 평소 같았으면 먼저 달려왔을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게 어찌나 마음 아프던지요.
공직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밖에서 보기엔 하는 일도 없이 세금만 축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더 없이 무거운 책임감과 과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산다는 걸 단박에 알게 되는 거죠. 봄이면 주말도 없이 산불대기에 나서야 하고, 바람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눈이 오면 또 눈이 오는 대로. 지난 겨울 손발이 부르트도록 밤새 눈을 치웠다던 신입직원의 말이 생각나네요. 까짓, 좀 알아달라고 하는 말 같네요. 그게 아닌데 말이죠. 한쪽 면만 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인 거죠. S형. 지난주 형의 발병 소식을 들으면서 순간 울컥하고 말았어요. 예삿일이 아닐 거라 직감했거든요. 새삼 하늘도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제가 알기로 형은 누구보다 성실근면한 사람이고, 특히 공직에 들어선 뒤론 책임감 강한 공직자의 표상이었어요. 그런 형이 하필 중요한 시기에 병가를 냈다면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중한 병이겠다 싶었던 거죠.
생각해 보면 형의 공직은 격무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던 듯해요. 거쳐 온 부서들이 말해주잖아요. 주로 기자나 시의원을 상대하는 부서에 근무했으니 말예요. 그 분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시정의 리트머스 역할을 하는 분들을 상대하다 보면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거죠. 기획실로 발령난 뒤로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근래 정시에 퇴근하는 형의 모습을 본적이 없어요.
S형. 따져볼 것도 없이 형의 병은 업무상 재해라고 봐야 해요. 형 혼자만의 병도 아니고요. 근래 들어 유독 급발병하거나 돌연사하는 4,50대가 속출하는데 원인은 죄다 격무와 스트레스라고 하더라고요.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피로사회’라는 책에는 ‘자기 착취’라는 말도 나오는데 공감이 되더라고요. “성과사회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있으며 자신은 곧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결국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거죠.
40대 후반, 아니 50대까지도 대체로 그런 문화에 찌들었던 세대가 아닐까 싶어요. 외부적인 스트레스와 동시에 내적으론 끊임없이 자기착취를 해왔던거죠. 성실과 근면, 책임감과 의무감, 자기계발과 성취동기 등에 자기최면을 걸어놓고는 정작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떨쳐버리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거죠. 그러니 몸도 마음도 정신도 여간해선 버텨내기가 힘들 수밖에요.
S형. 그래서 형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동료 선후배들의 사기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형 자신의 노고와 노력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형은 꼭 병마를 이겨내야 해요.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예의 형의 강한 의지와 긍정적인 사고방식, 치열한 열정으로 툭 털고 일어나시리라 저는 굳게 믿고 있어요.
S형. 어젯밤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 딸 다정이가 그러더군요. 중학교 들어와서 수학시험에서 100점을 맞기는 처음이라고요. 곧바로 형 생각이 나더라고요. 다정이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는 형의 큰 딸 덕분이라는 걸 다정이도 저도 잘 알고 있는 거죠. 형이 서둘러 일어나야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에요. 어서 일어나서 제 술 한 잔 받으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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