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날고 싶으면 빨라져야 해. 온 힘을 다해서 달리면 어느 순간 날아오르지. 그때부터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멈추면 그대로 떨어져버리는 거야.”
은희경의 최근작 ‘태연한 인생’(창비)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득 이 문장에 밑줄을 치게 된 것은 최근 독서계를 강타하고 있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쌤앤파커스)에 대한 반작용이었을지 모르겠다.
숨 가쁘게 달리다 지쳐 쓰러진 영혼을 위로하는 혜민스님의 온화하고 따뜻한 메시지가 호응을 얻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내려놓을 수 있고, 누구나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숱한 강제와 강박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실은 온 힘을 다해 내달리라고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사회의 키워드를 잡아채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강준만 교수가 최근 펴낸 책이 ‘멘토의 시대’(인물과사상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바야흐로 ‘멘토의 시대’인 것이다. 책은 한발 더 나아가 ‘멘토의 제도화’를 주장한다. 위로와 배려의 인간미를 제도에 접목해보자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가 만든 열풍
멘토 현상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도 빼놓지 않는다. 멘토 현상의 기저에는 누군가의 위로를 갈구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고통이 전제되어 있는데, 아울러 이 세대가 맞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테크가 남긴 하이터치 욕구가 청춘콘서트로 대변되는 새로운 유형의 멘토링을 성장시킨 또 다른 동력이라는 것이다.
현실은 외려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앞지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위로’를 넘어 ‘힐링(healing)’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힐링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멘토의 위로가 때로 공허하게 느껴질 때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기위해 저마다 ‘힐링캠프’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려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가 멘토를 만들어냈고, 그들에 대해 무한한 믿음과 존경을 표해왔다. 성철스님과 법정스님, 김수환 추기경 등이 원조 멘토였다면 그 분들이 떠난 자리를 안철수, 법륜, 박경철, 한비야, 김난도, 김미화 등이 메우고 있다.
멘토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이제 우리의 청춘들이 안도와 편안함을 찾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다. 대학등록금은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여전히 취업은 어렵고, 결혼과 출산에 대한 고민도 여전하다.
멘토가 필요 없는 사회 만들어야
그래서다.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멘토의 제도화’가 아니라 ‘멘토가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멘토들 중에 각 분야의 원로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유념할 일이다. 학계와 문단은 물론 정ㆍ재계,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어찌된 일인가.
애초 멘토는 ‘오디세이아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이었다. 오딧세이가 트로이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멘토(mentor)에게 맡긴 데서 유래한 것이다.
고로, 멘토는 ‘부(父)의 부재’를 전제한다. 여기서 ‘부’는 단지 생물학적 아버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테다. ‘부의 부재’는 곧 질서와 배려, 이해와 사랑의 역할공간으로서의 가정과 학교의 결핍을 의미한다. 각계의 원로들과 아버지가 멘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일이다.
‘멘토의 시대’는 우리사회의 근간인 가족의 해체와 붕괴,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의 권위 상실과 존재론적 위기에 연원하는 것인 셈이다. 그래서다. 진정으로 온화하고 따뜻한 사회는 멘토들의 활약이 넘쳐나는 사회가 아니라 ‘집 나간 아버지들’이 집으로 돌아와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최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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