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산마루에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 앉아서 푸른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을 본다.
할아버지는 한봉산(漢峰山) 양지 녘에 터를 잡아 봉림사(鳳林寺) 종소리 들으며 자란 소나무로 초가집을 지으시고, 할머니는 나의 첫 울음소리 반기시며 솔가지 매단 금줄 치시고, 소나무 장작불에 쌀밥을 지으셨다. 어머니는 그 밥을 잡수시고 힘을 얻으셨겠지. 나는 자라 삼칸대청 넓은 마루 이리저리 기어다니다가 소나무 대들보에 물고기 닮은 옹이를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아버지와 형은 소나무를 심고 기르며 푸른 꿈을 꾸시고, 누나는 산나물 뜯다가 송진 씹어 껌을 만들어 날 주었다. 사촌형은 소나무로 만든 지게에 날 태우고 작대기로 장단 맞추며 돌문이 고개를 잘도 넘었다. 소나무로 팽이를 깎아 얼음판에서 신나게 돌리고, 추운 겨울 청솔가지로 군불을 때면 기나긴 겨울 밤은 어머니 품처럼 따뜻했다.
그땐 소나무 어린 가지를 꺾어 속 껍질 벗겨 주린 배를 채웠다.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 솔잎 따서 찐 송편,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 송이버섯은 모두 향기로웠다. 껍질에 흠을 내어 송진을 모으고, 뿌리를 말려 기름을 내고, 관솔을 떼어다가 어둔 밤을 밝혔고, 소나무 태운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하늘나라 가시는 날, 소나무 칠성판에 누워 소나무로 만든 상여 타고 편히 가셨다. 거센 바람도 솔잎 사이를 지나면 솔솔 부는 솔바람이 되고, 가지마다 쌓인 눈 무거우나 가벼우나 말없이 견디며, 태어난 자리면 바위틈도 마다치 않고 사시사철 푸르름 간직하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총알 맞고도 살아있는 금강산 장터 솔밭 소나무, 벼슬 받은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 왜적이 송진까지 짜간 흉터 남은 주왕산 소나무, 문경 농암면 반송(盤松), 명당에서 자란 괴산 청천면 왕송(王松),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대궐 짓는 금강소나무, 보기 힘든 백두대간 황금 소나무, 귀히 쓰이는 소나무 황장목(黃腸木).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우리 조상 때부터 가장 가깝게 지내며 살아온 끈끈한 사랑을 주고받은 소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그 운치, 그 맑은소리, 그 푸른 빛깔…. 믿음직한 소나무와 같은 나라의 동량(棟梁) 서둘러 오리라 믿고 나니, 소나무 가지 아래로 해가 지고 있다.
송홍만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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