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전직 사립대교수가 해고무효 확인소송의 2심 재판장 집을 찾아가 패소판결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석궁으로 위협하다 결과적으로 위해를 가한 희대의 사건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에 대해 법률가의 촉각이 비로소 발동되기 시작한 것은 위 석궁재판 피고인의 죄명이 ‘살인미수’라는 얘기를 들으면서였다. ‘살인미수’, 그렇다면 피고인은 고의로 재판장을 살해하기 위해 석궁을 발사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럴 때 피고인이나 변호인은 정말 궁지에 몰린다.

 

본 건의 경우 피고인에게 징역 4년이 선고·확정되었고 ‘살인미수치곤 그리 중형은 아니네’라는 소회만 남긴 채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영화가 화제가 되고 나서 현직 변호사로서 공감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겸허하게 경청하지 않는 재판부는 결과 여하에 상관없이 불신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실제 이번 석궁재판에서도 피해자 판사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사실 관계를 명백하게 하기 위한 증인신청, 피해자 옷으로 주장하는 옷가지의 입수경위, 옷에 묻은 혈흔에 대한 감정신청, 석궁에 맞았을 경우 전치 3주밖에 나지 않는지에 대한 석궁발사실험신청, 왜 중간에 입은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없는지에 대한 전후관계 사실조사, 마지막으로 결정적 증거인 ‘부러진 화살’은 어디로 사라졌는 지와 관련하여 목격자에 대한 증인신청 등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피고인의 방어권인데 당시 재판부는 이를 전부 묵살했다. 왜 그랬을까.

재판에서 변호하는 일을 업으로 하다 보면 사실 이런 일을 전혀 겪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심한 자괴감과 분노이다. 속으로만 ‘판사는 궁예의 관심법이라도 전공한 걸까. 아니면 뱀파이어 검사처럼 과거의 사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것일까.

 

어떻게 저리 단정적일 수 있는 것인가’라고 소심하게 투덜거리는 정도였는데 본 건 사건의 변호인은 정말 적지 않은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본 건의 경우 최대한 원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해 보고자 노력하는 절차적 투명성이 보장되었다면 이렇게까지 사회적 논란이 확산될 수 있었을까.

 

이제 석궁재판이 재심에 회부되지 않는 이상 ‘부러진 화살’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러진 화살(불편한 진실)은 후폭풍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과녁은 어딜까. 비단 사법부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한 줌의 권력과 재물의 힘만 믿고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소통을 게을리하는 모든 대상을 향하여 날아갈 것이다.

 

권불십년, 권력자든 재벌이든 법조인이든 가리지 않고.

 

양진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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