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정거장으로 떠나는 기차

11월은 마지막 정거장으로 떠나는 기차다. 한적하게 비어 있는 객석 위에 쓸쓸함이 앉아 졸고 있고, 유리창 밖에서는 갈 곳 없는 낙엽이 배웅하고 있다.

 

11월은 찾는 이 없이 텅 빈 공중전화 박스다. 애끓던 통화의 온기도 오래전 사라진 채 쓸쓸하게 매달린 수화기에서 적막이 저 혼자 속삭이고 있다.

 

11월은 아이들이 떠나버린 심심한 놀이터다. 이따금 흔들리는 무료한 그네, 바람이 주르르 미끄러지는 저 외로운 미끄럼틀, 울타리 가에선 나무 삭정이가 막막한 표정으로 떨고 있다.

 

아쉽고 안타까운 11월

 

11월은 석산(石蒜)이다. 순 우리말로는 ‘꽃 무릇’이라고 불리는 꽃. 꽃은 9월에, 삭아버린 늑골같이 하얀 줄기 끝에서 선홍색 족두리 떨잠 같은 모양으로 혼자 피어나고, 잎은 10월에 이미 꽃이 지고 난 다음 돋아나서, 꽃과 잎이 서로를 보지 못해 상사화라고도 불리는 꽃이다.

 

스님을 연모하는 한 처녀가 있었더란다. 그러나 스님은 냉랭하기만 했다. 처녀는 스님에게 말을 붙여 보기는커녕 멀찍이서 바라보며 애를 태우다 그만 병이 나서 죽었더란다. 가슴에 한을 품고 죽은 그 처녀가 묻힌 자리에 꽃 무릇이 돋아났고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모양새가 처녀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닮았다고 해서 상사화라고 부르게 됐단다. 11월은 그렇게 안타까운 달이다.

 

세월도 인생처럼 마지막으로 치달을 때는 더 빨리 달리는 것인지, 얼마 남지 않은 두루마리 휴지 풀리듯 내 닫고 있다. 곧 12월이되고 이 해도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수많은 사건사고와 함께 한동안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장 선거가 나라를 한번 들썩이게 했고, 무수하게 쏟아지는 예언들처럼 지구가 종말로 가고 있는 것인지, 세계 각 곳에서 지진이며 홍수로 아까운 목숨들이 스러졌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일본 등 세계경제가 흔들리고, 아직도 요원해 보이는 중동의 평화며, 아프리카의 끝없는 목마름과 배고픔, 이렇듯 지구는 요동치는 놀이기구에라도 올라탄 것처럼 불안하게,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한 달의 여유로 한해를 기다리자

 

완보(緩步)동물이라고 불리는 원시생물이 있다. 원이름은 테디 그레이드라고 부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로도 기록되는 이 동물은 살아가는 환경이 팍팍해지면 스스로 삶을 접어버린다고 한다. 그렇게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자기가 살기 적합한 시절이 올 때까지 죽은 듯 기다렸다가 환경이 좋아지면 다시 깨어나 생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지구 탄생 이래 세상은 한 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지만 삶이 각박해지고 환경이 척박해지면 완보동물처럼 그렇게 한동안 삶의 휴지기를 보내다가 다시 생을 이어갈 수는 없을까.

 

가는 한 해가 아쉬운 것인지 우리 아파트에는 빨간 줄담쟁이 꽃이 피었다. 5.6월, 봄에서 건너가는 여름에 피는 꽃이 웬일로 이 늦가을에 피어 보는 이를 안쓰럽게 하고 있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에 있는 천리포 수목원에는 지금 벚꽃이 만개했다고 한다.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꽃을 피우는 품종이라고는 하지만 바람이 불고 흰 눈이 세상을 덮는 시절에 피는 벚꽃이라니 너무 쓸쓸하고 애잔할 것 같다.

 

아라파호 인디언은 11월을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12월 한 달의 유예가 있다는 여유로움이다. 그래, 11월은 12월 한 달의 여유가 있는 달이다. 그 여유로움으로 한해를 기다리는 달이다. 기다림은 시간을 윤기나게 한다고 했으니, 11월은 잘 닦인 놋그릇처럼 빛나는 달인지도 모른다.

 

신효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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