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밭 음악회

지난 주말 강원도 산간도로를 구비돌아 양구를 다녀왔다. 만산홍록의 단풍은 지고 울창한 수목들은 육중한 조락(凋落)의 침묵속에 미동도하지 않았다. 희뿌연 11월의 연무(煙霧)와 함께 사위(四圍)는 고요의 바다와 같았다. 일 년 사계절이 다 특징이 있지만, 낙엽이 흩날리는 만추의 절기야말로 영락없이 백발이 흩날리는 우리 일행과 같은 실버 세대의 짝꿍임에 분명했다. 왕성한 생명체가 앙상한 나목으로 변모해가는 겉모습이 닮았고, 화개화락 산전수전 삶의 역정을 거치면서 농익어 풍화된 유순한 순천(順天)의 지혜가 비슷하다.

 

양구군 해안면은 6·25전쟁 때 작명된 펀치 볼(punch bowl)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펀치라는 단어가 ‘주먹으로 때리다’는 뜻도 있다보니, 항간에서는 그 곳 지형이 주먹으로 쳐서 푹 들어간 모양새 같대서 펀치 볼이라 했다고 와전돼 있다. 하지만 펀지 볼이란 영어 뜻 그대로 넓적한 ‘화채 그릇’을 뜻하며, 해안면 일대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큰 대접같이 생긴 분지(盆地)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땅, 양구

 

아무튼 첩첩 산중에 넓은 분화구와도 같은 지형은 누가 봐도 조물주의 의도된 조화인양 범상치가 않았다. 나는 내심 멀리 천지개벽의 시대부터 이곳은 국토의 용마루 백두대간의 단전처가 아닐까 생각하며, 일행과 동화같은 몽상을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 플라톤이 주창한 폴리스 규모의 이상국가를 세워보면 어떨까. 아니 유토피아니 무릉도원이니 상그리라니 하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가상공간을 설계해 세계의 명소로 삼아도 좋겠고. 당장은 한국전쟁의 격전지답게 6·25를 추념하고 지구촌에 평화의 메시지를 발신할 평화의 요람지를 조성해서 국가 브랜드화하는 일도 의미있겠고. 아무튼 이곳에 푸른 지구별의 중심축이 될 치외법권적 이상향을 만들고, 육중한 관문을 만들어서 서울 하늘밑의 역겨운 꼴불견 군상(群像)들만 못들어 오게해도 조국의 산하는 혈기가 되살아날게야!’

 

일행 중에는 9순을 바라보는 방송계의 원로가 계셨다. 한국방송 PD 1호로 호칭되는 최창봉 선생은 여러 방송사의 개국주역으로 공헌했고, 주요 방송사들의 기관장을 비롯해서 문화예술기관의 요직을 거치셨다. 하지만 내가 그 분을 소중히 모시고 싶은 진짜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나는 6·25세대의 아픔을 여과없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주가 고향이신 최선생은 이름 그대로 실향민이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역전(歷戰)의 노병이시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왕년의 전투지를 되짚어보고 싶어 하시는 그 분의 심정이 백 번, 천 번 공감의 심금을 타고 저며온다.

 

이곳에서 망향 음악회를 열자

 

해안분지 산정의 을지전망대는 아주 맹랑한 곳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시계가 넓었는데, 멀리는 금강산 거북바위와 촛대봉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뒤로는 대암산이며 설악산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기실 을지전망대가 예사롭지 않음은 운해 속에 섬처럼 솟아오른 고봉준령들의 위용만이 아니다. 그곳에 서면 가칠봉 전투, 도솔산 전투, 피의 능선, 제4 땅굴 등 펀치 볼 지구 전투의 갖가지 사연들이 환청되어 울려오고, 수백만 이산가족들의 고향마을 추억과 애환들이 북녘 땅 산야에서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기필코 내년에는 이 곳 구름밭 정상에서 고향 그리는 시도 읊고 노래도 하는 망향(望鄕) 음악회를 개최해야지. 최선생님같은 천만 이산가족들의 사무치는 향수(鄕愁)를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기 위해서. 그런데 음악회 제목은 뭐로 하지? 물망초 음악회? 아니면 꿈에 본 내고향? 불효자는 우옵니다?’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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