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손만 잡히고도 도주하지 않은 체 낯선 그를 따라간 것일까? 왜 비명도 지르지 않고 발버둥도 치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잠든 후에도 왜 탈출하지 않고선 본인도 잠이 들어버린 것일까? 전화 한 통이면 연락이 닿았을 것을, 왜 허술하게 숨겨둔 핸드폰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일까?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사건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느꼈던 의문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전문가 의견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피고인의 주장에 비하여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은 그야말로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한 건 두 건 유사 사건을 대하다보니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지적장애인인 피해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 도가니라는 영화의 개봉으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의 심각성이 다시 한 번 온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이리도 적나라하게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정부도 비등한 여론을 고려해 지난 주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의 경우 아동에 대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친고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고소인에 대해 사건 당시 항거불능 상태였음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 역시도 면해준다고 한다. 2000년 이전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일 년에 한 건이 되지 못했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 같은 변화는 실로 고무적이다.
여전히 염려스러운 부분은, 이 같은 법률적 지침의 변화가 장애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머리에서도 제시했지만 지적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기본적인 의문은 현재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즉 이 모든 결정이 수사나 재판에 임하는 실무자들의, 장애인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어렵게 도입된 정부 지침이 현장에서 그대로 지켜질 것인지 자꾸 의심이 든다.
장애인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취약성으로 인해 보호자나 주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성장한다. 따라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우 순종적이다. 또한 의사결정 능력의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도 힘들다. 그러다보니 싫은 것을 싫다고 주장할 능력도 충분치 않지만 더욱이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착한 아이’ 신드롬에 시달린다. 때문에 여러 가지 위험에 쉽게 노출이 되는데 그중 하나가 아는 이들에 의한 성폭력이다. 이들은 성폭력 상황에서 조차 위험을 인지하더라도 쉽게 저항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상대의 요구에 선뜻 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특히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려할수록 더욱 곤경에 빠져들게 된다. 지적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제는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충분한 항거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가진 고유한 요구특성(demand characteristics) 때문이다. 손목만 세게 잡히더라도 자신의 뜻을 쉽게 포기해버리고 요구에 순응하는 그들의 태도를 흔히 법률적으로는 ‘동의’라고 여긴다. 또한 ‘빨리 빨리 걸었는데도 그 사람이 금방 따라왔다’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도주를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마치 성폭력을 합의된 성관계로 오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의 독특한 행동패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있는 사람들이 수사에서부터 재판에까지 참여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적절한 대변자 없이 진행되는 조사과정은 그들의 뜻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이수정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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