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그리고 비움의 즐거움

이사를 했다. 30년 만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쟁여 두었던 이사(移徙)는 거사(巨事)였다. 30년 묵은 세월을 들춰내고 헤집어서 켜켜이 쌓인 기억과 조우하는 일이었다. 기억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짐을 꾸리다 보니 까마득히 지난 시절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가 하면 엊그제 일이 가뭇없기도 하다. 들추어 낸 옷이며 장신구가 낯설기 그지 없다. 무슨 생각에 내가 저것을 장만했을까. 어디에 필요해서 저런 걸 다 사두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했던 물건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예컨대 지난 봄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 새삼 중학교 시절 모처럼 공원에 가서 찍었던 가족사진이 보고 싶었다. 해묵은 앨범은 물론 오래 된 습작 노트 따위를 다 뒤져도 사진은 종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짐을 정리하는 도중 우연히 낡아빠진 가방을 들추다가 너무도 뜻밖에 사진을 찾았다.

 

누렇게 바랜 인화지 위에 일곱 식구가 공원 누각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있는 흑백 사진. 그중 이미 네 식구는 저세상으로 가버린 아픈 사진이 낙엽처럼 팔랑 떨어져 내렸다. 무슨 때를 맞아서 찍은 기념 사진이었을까. 우리 식구 모두는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단장을 짚은 채 약간 거들먹 대는듯한 자세였고, 어머니는 오간지 치마 저고리 차림에 해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사진을 보다가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아래 동생의 모습 때문이었다. 동생은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덕분에 내 별명은 무녀리(문열이)였다. 첫째라서 어머니의 출산 문을 여느라고 용을 쓰다 보니 작고 못나게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 무녀리 언니에게 물려받은 한복이 이미 동생에게 작았던 터라 짧은 저고리 소매기장을 감추고 발목 보다 껑충 올라간 치마 기럭지를 가리느라 엉거주춤 무릎을 약간 구부린 모양새였다. 아마도 자기보다 키가 작은 언니를 배려하느라 그랬을 터였다. 그 동생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이사를 하며, 과장 하자면 두 트럭분 정도의 짐을 버렸을 것이다. 이사를 떠나면서 한 트럭을 버렸고, 새집에 들어가며 또 한 트럭 분량을 버렸다. 제일 많이 처분을 한 게 책이었다. 서고 가득 진열 했던 책들은 한때 내 축적된 지성(!)과 정서와 자존심의 표징 역할 까지 했던 것들이었다. 그런 책들을 처음에는 아까워 하다가, 주저하다가, 막판에 가서는 아낌없이 구민회관이며 지하철 도서시설 등에 시집보내듯 싸서 보냈다. 속으로 위로하기는 ‘그래,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뭐 든지 다 알아 볼 수 있는 세상인데 뭐’ 했지만 실은, 책들은 먼지와 한 통속이 되어 30년 동안 숨죽인 채 진열돼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옷을 버렸다. 딴에는 멋을 부린다고 시절에 맞춰 사 모았던 옷들이었지만 다시 보니 추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월 따라 옷도 이미 늙어버린 것이다. 낡은 가구야 말로 새 집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기능성 위주로 마련된 집에 장식성을 강조한 가구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버리고 버리다 보니 우리 삶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될까 생각을 하게 됐다. 건축가 승효상은 자신의 저서에서 건축이란 비움의 완성이라는 말을 썼다. 이사를 겪으며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화가 이우환을 보자. 그의 그림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달린다. 흰 캔버스 위에 작고 검은 점 달랑 하나. 지금 보다 더 많이 소양이 부족하던 시절 나는 속으로 그 그림은 사기라고 생각했었다. 큰일 날 생각이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자신의 철학으로 강조했다. 소유과 탐욕의 해악이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일갈한 것이다. 이미 그들은 비움의 필요성, 비움의 여유, 비움의 아름다움을 선각한 것이다.

 

경제위기로 나라가 뒤숭숭할 때였다. 스님 한분이 그랬다. 욕심을 줄이고 살면 시절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다고.

 

이사를 하고, 많은 것과 작별을 하고, 나는 새로이 비움의 즐거움을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신효섭 시인·한국여성언론인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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