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

결국 대학교수직으로 영년퇴임(盈年退任)을 했지만, 기실 나는 강단에서 남을 가르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30·40대만 해도 강단에 서는 것이 당당했다. 대단한 지식이라도 쌓은 양 학생들 앞에서 의기양양했고, 한 귀퉁이를 익히고는 전체를 다 아는 양 그들을 훈도(訓導)하고 닥달했다. 한마디로 한줌의 알량한 지식을 전수해주는 것이 대학교육의 알파요 오메가로 용인되는 시대적 풍조에 속절없이 순치된 채, 나 역시 전공지식을 전수하는 숙달된 되풀이 작업에 의심 없이 안주해왔다.

 

하지만 지천명을 지나 이순의 나이로 접어들자 그 같은 강단의 관행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갔다. 자신을 객관화시켜볼 인생의 연륜이 쌓이게 되자 사물의 본질과 핵심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때가 되면 알곡이 익듯, 나이 따라 철이 든 것이다. 철이 드니 강단에 서는 것이 한층 거북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보다 소중하고 근원적인지도 모른 채 관행적인 지식주입에만 열을 올렸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놓았다는 모대학 인문대학에 출강할 때의 경험이다. 미학과에 개설된 강좌지만 여러 단과대학 학생들이 두루 있었다. 효학반(斅學半)이랄까, 10여년을 출강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터득했다. 그 중 하나로 엘리트 학생들의 적나라한 행태를 실체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말시험을 보면, 어떤 학생은 16절지 반장도 채우지 못하는 반면, 어떤 학생은 시험지 한 장을 더 달래서 4면을 빽빽하게 메운다. 채점을 해보면 반장밖에 채우지 못한 학생은 본인이 배운 대로 아는 대로만 솔직히 쓰고만 반면, 4면을 채운 학생은 현란한 미사여구에 이리 틀고 저리 틀며 뻔한 내용을 장황하게 분식(粉飾) 해놓기 일쑤였다. 뿐만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결석을 해도 ‘반장짜리’ 학생은 결석자체를 미안해하며 사유도 간단한데, ‘4면짜리’ 학생은 결석이유도 분분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강의 후에 퇴실을 할 때도 전자는 선생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려주지만, 후자는 상하분별 없이 자기가 먼저 풀쩍 나가버린다.

 

아무튼 불편한 진실이지만, 소위 잘나간다는 법대, 경영대, 의대 등 후자의 학생들은 절대평가에서 항상 A학점대를 석권하고, C와 D의 학점은 전자의 학생들 몫이었다. 통계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 됨됨이’로는 ‘4면짜리’ 학생들보다 ‘반장짜리’ 학생들이 단연 A학점대의 인간적인 젊은이들인데도 말이다.

 

바로 우리네 교육현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성교육은 방치한 채 그간 우리는 지식주입의 경쟁교육에만 몰입해왔다. 그래서 머리만 좋아서 판검사로 가고, CEO로 가고, 관계로 가고, 정계로 가면 인생 출세로 간주하고 자만해진다. 우리사회에는 엘리트도 많고 지성도 많고 인재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네 일상은 각박하고 살벌하며, 요사스런 말들의 성찬으로 불신풍조가 만연해가는 근원적인 뿌리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하겠다.

 

나는 퇴임과 더불어 일체의 출강을 끊었다. 딴에는 좋은 조건의 강의제의도 사양한 채 강단에 서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전공지식을 토해내기에는 공허감이 앞서고, 이심전심으로 학생들을 감화시키기에는 자질과 수양이 한참 미달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가르친다는 것의 본질을 간간이 반추하며 5~6년의 세월이 지났다. 내 나이도 70대 중반으로 접어든 요즘, 나는 다시 대학원 학생들의 강의를 수락했다. 지식전수에 앞서 주창하고 싶은 소신이 있어서였다. 지름길을 찾지 말고 돌아가라고 가르치고 싶어서였다. 요령과 효율만을 찾지 말고, 뜸들임이 긴요함을 역설하고 싶어서였다. 알기만하는 박사형이 되지 말고 소신을 세우는 지사형(志士型)이 되고, 재승박덕형의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지 말고 우선 ‘사람’이 되어 세상살이 살맛나게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라고 일러주고 싶어서였다. 비록 학생들이 흘러간 ‘꼰대’의 잠꼬대라고 졸며 하품을 할지라도 말이다.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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