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추석이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춤을 추는,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이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그림의 주인공들은 이중섭과 부인, 두 아들이다. 모두 벌거벗은 채,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듯이 둥글게 돌고 있다.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도 ‘춤’이 있다. 벌거벗은 다섯 명의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춤추는 그림이다.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에 비하면 인물의 형태와 색상이 단순하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이 두 그림은 여러 명이 손을 잡고 알몸으로 춤을 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거친 표현과 단순한 표현 외에 눈에 띄는 차이가 하나 있다. 서로 잡고 있는 손의 표정이 다르다. 마티스 그림에서 주인공들이 맞잡은 손은 헐겁다.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중섭의 손은 부인이 아들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왜 손목을 힘주어 잡았을까?
1952년 7월, 가족을 데리고 월남한 이중섭은 6·25전쟁으로 피란을 다니다가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의 처갓집으로 보낸다. 외톨이가 된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수많은 엽서와 담뱃갑의 은박지, 종이 등에 그림으로 남겼다. 비록 오늘날의 ‘기러기 아빠’처럼 자녀교육 때문에 혼자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기러기 아빠였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마티스 그림의 춤추는 남녀는 가족이 아니지만 이중섭 그림의 주인공들은 혈육으로 구성된 가족이다.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손에는 서로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이중섭의 소망은 큰 것이 아니었다. 화가로서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온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의 사랑에 의지하며 산다. 평생직장의 붕괴와 사회보장의 해체 등 경제적인 불안이 개인의 삶을 시시각각 위협하고 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다행히 등 뒤에는 가족이란 듬직한 응원군이 있다. 가족은 삶에 의미를 주며 역경을 헤쳐 나가게 한다. 생활전선에서 아득바득거리던 사람들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순한 양이 된다. 누구의 상사, 누구의 부하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으로 아이와 더불어 평화를 누린다. 가정에서는 날선 경쟁심 따위는 필요가 없다. 느리게 행동해도 좋다. 추석에 사람들이 한사코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가족의 사랑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와 허기를 지우고 새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부모님이 계시고 끈끈한 사랑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 맞는 부모님의 손을 잡아보면 안다. 덥썩 감싸 쥐는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바로 ‘사랑의 온기’임을. 모든 것을 감싸주는 듯한 온기 하나로 마음의 상처는 씻은 듯이 가라앉는다. 김종삼의 시 ‘묵화’에서 할머니가 종일 고생한 소의 목덜미에 말없이 얹어주는 손처럼, 부모님의 따스한 손길만으로도 자식은 모든 것을 이해받은 듯 마음이 평온해진다.
사실 부모님의 소망도 이중섭의 소망과 다를 바 없다. 온가족이 함께 웃으며 사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함께하지 못할 때 삶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이중섭도 암울한 생활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며, 현실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을 그림으로 달랬다. 결국 죽어서 가족의 품에 안기긴 했지만, ‘유서’처럼 남은 그림은 가족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증거하며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이제 추석은 끝났다. 부모님의 품을 떠나 치열한 삶의 현실로 복귀해야 한다. 떠나올 때, 다시 한 번 힘껏 잡아주시는 부모님의 손길에서 우리는 든든한 기운을 충전 받는다. 그 응원의 손길에 힘입어 우리는 또 한 시절을 보낼 것이다. ‘춤추는 가족’은 이중섭의 꿈이자 우리 모두의 꿈이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박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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