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순이’는 영화 식객에서 우수한 한우를 찾는 경합에 나온 소 이름입니다.
병든 자식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든 소를 팔아야 하는 아비의 심정과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지냈던 소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아들의 눈물이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애보적인 감동만이 아닌 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지금은 아메리카에서 살육당한 채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북아메리카의 주인으로 당당히 세계와 자연 속에서 살았던 인디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기를 먹습니다.
인디언들은 고기를 잡아먹을 때 짐승에 대한 감사와 기억으로 매년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동물들은 한결같이 살벌한 도살장에서 아수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600그램 한 근으로 포장되어 나옵니다.
많은 꽃순이들이 우리 아버지의 농사도우미로 아니면 영화속에서처럼 철수의 학비자금으로 살다가 결국은 한 가족의 영양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순환의 사이클에서 감사와 추억을 빼버리고 오직 열량과 영양소만으로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생각해 봅니다.
돈벌이를 위한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된 꽃순이는 좁은 공간속에서 동물성 사료를 먹고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맞으면서 살아가다 결국 자기 발로 서지 못하고 죽어가는 소로 생을 마감합니다.
자본의 자유를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소, 병원 이익을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환자의 건강, 젊음을 경쟁터 속에서 보내야만 하는 우리의 아이들….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무한 경쟁체제란 자본이 사람을 먹는 아비규환과 같은 현실로서 철수아버지는 농약을 먹고 자살하고, 순희 아빠는 직장에서 쫓겨나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카드 빚 때문에 영희 엄마는 자식들을 품에 안고 한강물에 꽃잎처럼 떨어지는 모습은 우리네 삶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물의 죽음이 애달퍼서 평생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인디언의 마음속에는 감사와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겠지만, 소를 영양소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격려와 감사 그리고 협동이 자리 잡고 있지만 자본의 자유 속에 살다보면 하나의 대상이 돼 탐욕과 경쟁의 마음만 싹 터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 자연 속에 존재하는 미물에 이름을 한번 지어보세요. 바라만 보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친구로서 말입니다. 창가에 있는 화분, 도로 한구석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들꽃에게도 말입니다.
그들 모두가 곧 꽃순이로 태어날 것이며 잊혀져가는 감성이 촛불로 타오르는 순간 그것은 곧 기쁨이며, 감동이며, 눈물이 될 것입니다.
/정경진 경기도한의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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