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도 중복, 말복은 꽃사태라고 그랬다. 어딜 가나 꽃들이 있다. 도심 뜨거운 아스팔트에도 구멍을 뚫고 이름 모를 한 송이 풀꽃이 올라온다. 언제부터인가 야생화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야생화 전시장은 물론 서산 신두리 모래사구도 몇 번이나 찾아갔었다. 지천으로 깔려 있는 꽃냉이와 야생화들. 네티즌들이 즐겨 읽는다는 ‘꽃냉이’라는 시도 신두리를 다녀와서 쓴 시다.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꽃들, 그중에서도 야생화의 의미는 작품 속에서 중요한 이미지로 남는다.
초등학교 때 읽은 ‘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은 재미도 있지만 내겐 감동적이었던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내용 중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은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가 캐시에게 매일 꺾어다 바친 야생화 ‘히드꽃’이었다. 그 ‘히드꽃’에 대한 나의 집착은 대단했다. 식물도감, 식물사전, 백과서전을 찾아가며 ‘히드꽃’을 깊이 알기를 원했었다. 작품이 감동적일수록 야생화 ‘히드꽃’에 대한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우리꽃들
파리대학 초청 시인으로 유럽에 갔을 때 영국을 들렸다가 작품 ‘폭풍의 언덕’의 작가 샤론부론테의 집과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폭풍의 언덕’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폭풍의 언덕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히드꽃’은 우리나라 개망초꽃 정도도 못 되는 볼품없는 흔한 꽃이었다. 이런 꽃이 문학작품 속에 등장할 때는 대단한 의미를 지니게 되다니 나는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던 ‘히드꽃’을 싱겁게 만나고 돌아왔다.
한국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야생화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 야생화들이 주는 감동 때문에 요즘은 산에 있던 것들이 집으로 옮겨다 심겨지는 야생화들의 수난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야생화에 대한 감동이 거의 없다. 야생화에 대한 감동이 없는 그 젊은이들이 쓴 작품에도 야생화는 없다. 그저 눈에 쉽게 뜨이는 서양꽃들의 이름만 가끔씩 등장할 뿐이다.
젊은 작가들은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자연의 깊숙한 곳이나 버려진 풀 사이에 도움도 없이 혼자 피고 지는 야생화를 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작가가 쓴 감동이 없는 대상을 더구나 독자는 더더욱 감동을 느낄 수 없지 않을까? 문학작품 속에서 그 많던 풀꽃들, 그 야생화의 이름과 사연들이 사라지고 있다.
시인들이 소설가들이 붙잡고 써댄 그 많던 풀꽃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생뚱맞은 외국의 성 이름, 이국의 도시 이름, 외국의 영웅 이름들이 문학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거기에 더 흥미를 갖는다. 한국의 참맛도 느끼지 못했으면서 외국에 드나들게 된 해외여행의 급격한 물살을 탄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양꽃에 가려져 점점 자취 감춰
외국의 꽃 이름은 잘 외우면서, 또 여행지에서 메모에 꼼꼼하게 기록까지 해오면서 자기 나라 강산에 수없이 피고 지는 어머니 같은 꽃들의 이름은 모르고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야생화 사전이나 식물 사전은 도서관에서도 열람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나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던 문창과 학생들에게도 확인해 보면 야생화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그런데 충북 괴산 추산초등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 손톱에 봉숭아물을 빨갛게 들이는 날을 정해 놓고 행사를 벌였다는 기사를 지면에서 읽었다. 좋은 행사라고 여겨졌다.
바람과 햇빛이 특이한 향기를 간직한 야생화. 그 이름에도 깊은 의미들이 새겨진 그런 야생화들이 문학작품 속에서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기의 체취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최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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