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중도

노나라의 단표라는 사람은 산골에 숨어 물이나 마시고 살면서 세상 사람과 더불어 이익을 꾀하지 않고 나이 칠십이 되어도 그 얼굴빛은 오히려 어린애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굶주린 범을 만나 먹혀 죽었다.

 

장의라는 사람은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을 가리지 않고 분주히 드나들면서 이익을 꾀했지만, 나이 사십에 내열병이 들어 죽었다.

 

단표라는 사람은 안을 길렀지만 범에게 그의 바깥을 먹혔고, 장의는 그 바깥을 길렀지만 그 안을 병에게 먹혔다. 공자도 말했다. 너무 들어가 숨지 말고, 너무 나와 드나들지도 말아라. 마른나무처럼 그 안팎의 중간에 서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산층이라는 두꺼운 사회계층이 있었다. 언제나 없어질 것 같지 않게 커다란 의미도 이 사회 경제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었다. 직장이나 기관에도 양극을 치닫지 않는 말없는 구성원의 층이 그 직장이나 기관을 지키고 있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양극으로 치닫는 사람을 가생이에 두고 묵묵히 침묵하며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국민들이 여론의 두꺼운 층을 만들며 안정된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양극의 상반된 상황들만 쟁점

 

그러나 요즘 자고 깨면 각종 언론 매체의 보도된 내용들은 양극을 치닫는 격렬한 목소리뿐 그 외에 잘 들을 수 있는 게 없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사회사상이 양극의 상반된 상황들만 쟁점이 되고 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자석의 서로 밀고 당기는 양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간이라는 부분이 존재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밀치는 힘도 당기는 힘도 중간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다.

 

공자의 말대로 마른나무처럼 그 안팎의(극단적 사실의) 중간에 서주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한 유명 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다. 고객들이 바글바글 대며 모이는 곳은 명품관 주변 아니면 헐값에 판다는 가판대에 싸놓은 상품 주변이었다.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상품(명품)아니면, 시장보다 더 싼, 값이 떨어진 상품 앞에만 소비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것저것, 싼 것 비싼 것, 고르게 사주던 중산층의 모습들은 어디로 갔을까? 양극을 치닫는 정치 현실에서 이말 저말, 이 논리 저 논리, 잘 들어주면서 그러면서 두껍게 여론을 잡아가던 그 무서운 층들은 어디로 갔을까, 점점 중간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기심으로 양극화된 자들의 논리, ‘중도는 비겁하다’라는 비난에 밀려 양극으로 밀려나고 있다.

 

얼마 전 어떤 여론기관에서 요청한 중요한 설문 조사지를 받고 응해야 할 처지가 되었었다. 설문 내용을 읽어보니 내 의견을 표시할 부분은 많은 문항에서 삭제되어 있었다. 만일 찬성하신다면 그 이유를 써주십시오. 만일 반대하신다면 반대사유를 써주십시오. 찬성도, 반대도 마땅치 않은 수많은 관심들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 나는 적지 않게 공란을 남기고 설문지를 보내준 적이 있다.

 

‘예’와 ‘아니오’ 사이에는 무수한 점들이 있다. 이 무수한 점들이 무시된 채 ‘예’라는 ‘아니오’라는 사실만 중요시된다면 상당히 위험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중간에 서서 잠시 생각해봐야

 

중간에 서서 잠시 생각해보고 이쪽저쪽에 대하여 자세히, 깊이 알아보고 차츰 어느 쪽인가로 가까이 가면서 자기 의견을 실어줄 때 이 사회는 건강하리라고 생각한다. 양극을 치달아 오르면서 서로 국민이 자기편이라고 우기는 정치 현실을 매일 눈앞에 맞대하고 보면서 말없이 가운데에 서있던 많은 자들은 양끝으로 점점 끌려가고 있다.

 

가운데가 점점 비어가고 있다.

 

겉은 물을 따라 순응하지만 속으로 중심을 지켜주는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무시할 수도 없는 잘 무너지지도 않는 예스와 노 사이의 무수한 점들의 집합, 그 ‘중도’라는 층이 점점 사라져 위기를 맞고 있다. 이 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어떠한 형태로든 회복되어야 할 힘이다.

 

최문자  시인·협성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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