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자신의 음악이 지향하는 세계는 새의 노래를 닮는 것이라고 했다. 조류학자이기도 했던 그에게 새소리는 음악적 영감의 근원이었고 새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자를 표현하기도 했다. 새들과 대화가 가능했던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San Francesco d'Assisi)에게도 새는 천상의 신의 세계를 믿는 지상의 인간들에게만 보이는 기적의 언어였다.
새는 자신의 몸무게로 인해 지상으로 추락하는 피조물들과 달리 자신의 몸짓에 의해 하늘을 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신체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다. 인간의 모든 실존적 고통은 중력을 거부할 수 없는 몸이 불러들이는 충동, 욕망, 증오, 질투, 멜랑콜리, 엑스타시 그리고 경이감과 같은 정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정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이 평정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조각은 인간 신체를 표현함에 있어 신의 형상을 이상으로 삼아 실존적 존재의 무게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모든 조형적 노력을 쏟아 부었다. 결국 이들 모두에게 삶의 무게에서 탈출하려는, 인간 존재의 반중력을 향한 몸부림이 모방하고자 했던 것은 신의 음성을 전하는 천사의 가벼운 날갯짓 아니었을까?
인류의 문학과 예술의 역사는 인간의 반중력을 향한 시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보면 정념과 비현실 또는 허구, 이 양자가 교직해내는 서로 다른 경험세계의 영역이 신화는 물론 소설의 근원을 이루어 왔다. 허구에 대한 인간의 본원적 충동이야 말로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의 비현실적 세계를 믿게 하고 그 속으로의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어찌 보면 3D 영화도 과학기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타지에 대한 근원적 욕구 탓일 수도 있다. 정념에서 비롯되는 실존적 조건을 상징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허구나 판타지가 고안되었다면 이는 반중력을 향한 예술의 노력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진다.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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