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문제가 없고 고통이 없던 때는 없었겠지만 요즘 세상은 점점 더 사악해 지고 죄의 형태도 지능적이고 교활해 지는 추세이다. 땅 속에서 불법으로 모아 감추어둔 수십억의 돈 뭉치가 발견되고 먹을거리 해물을 양잿물에 불려서 몇십 억의 수익을 낸 업자가 구속된 이야기가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물건을 사다 할 때 사용하는 한자 살 ‘매(買)’는 그물 ‘망(?)’과 조개 ‘패(貝)’가 모여 만들어진 합자(合字)이다. 즉 조개를 그물로 떠내듯이 물건(物件)을 사 모으다 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런데 반면 반대로 물건을 팔다 할 때 사용하는 한자 팔 ‘매(賣)’는 살 ‘매(買)’에 선비 ‘사(士)’가 붙여진 단어이다.

 

무슨 말일까? 물건을 사는 사람은 정성 들여 그물로 조개를 거두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며, 반대로 파는 사람은 그 모은 정성을 선비의 마음과 자세로 물건을 팔아야 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선비의 마음으로 물건을 파는 팔 ‘매(賣)’에 삼수변(水)이 붙으면 어떤 단어가 될까? 도랑 ‘독(瀆)’이 된다. 농경사회에서 작은 도랑을 만드는 일은 생명을 주는 일과 같은데, 도랑을 만들어 타인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는 사람 역시 선비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시 팔 ‘매(賣)’에 말씀 ‘언(言)’이 붙으면 읽을 ‘독(讀)’이 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도록 쓰고 말하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파는 사람이며 이 역시 선비의 마음으로 해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매(賣)’에 계집 ‘여(女)’가 붙으면 과연 어떤 단어가 될까? 놀랍게도 더럽힐 ‘독(?)’이 된다. 자신의 욕망과 욕정을 위해 사람을 사고 파는 일은 결코 더러운 독이 됨을 발견한다. 사람은 결코 사고 파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점점 사회가 무섭다고 말한다. 이는 어쩌면 선비의 마음을 점차 잃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침식된 우리사회와 병든 생각을 치료하는 길이 무엇일까?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선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외유내강한 사람을 군자라고 말한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배려하는 마음, 그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모든 인생은 역사의 지평에 아무리 미미할 지라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영향력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 하는 것일 뿐이다.

 

성경 잠언 4장 24절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난다.”고 말씀한다. 또한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한다.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권면한 말씀이다. 마음이 좋으면 좋은 사람이요, 마음이 크면 큰 사람이다. 씨앗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마음은 길가와 같이 굳음 마음이 아니라 옥토와 같이 좋은 마음이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신 그 마음이다.

 

선비의 마음을 넘어 예수의 마음을 품기 시작할 때 우리 사회는 더 아름다운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반종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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