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잡상

“문화의 세기가 다가옵니다.” 1999년 내내 서울 세종로 문화관광부 본관 건물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던 구호다. 산업화로 대변되는 20세기를 지나면서 품격과 교양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21세기를 준비하자는 뜻이었다. 새 천년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전 세계가 기대와 희망으로 흥분했다. 2000년을 보내면서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고 10년이 지났다.

 

새로운 천년이라는 것도 결국 연말과 연시를 나누는 달력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사이에 세상은 급변했다. 혁명적 진보를 이룬 것은 역시 정보문화이다. 정보혁명은 소통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소통의 민주화는 신비감으로 포장된 사회 각 분야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전통적인 권위주의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평등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권위주의란 위계질서와 지배·복종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상하간의 계층적 인간관계를 순리로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한다. 권위주의가 가장 먼저 퇴보하기 시작한 곳은 행정 분야다. 지자체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권력자는 봉사자의 입장으로 변해야 했다. 속도가 늦기는 해도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구호들은 행정이 주도해 왔다. 반면에 사법과 입법 등 권력의 견제기구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에 함몰돼 있다. 사법부야 인간에게 징벌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니 그럴 수 있겠으나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 자격을 위임받은 의회가 권위를 앞세우는 건 왠지 어색하다.

 

시대문화 발목잡는 권위주의

 

국회가 열리면 총리나 장차관을 비롯해서 모든 간부들이 줄줄이 대기해야 한다. 업무가 마비되는 건 당연하다. 광역이나 기초의회도 똑같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풍경이 그대로 연출된다. 고위 책임자를 불러다 세워놓고 부하들 앞에서 호령하고 훈계하는 모습은 권위주의를 넘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존경과 권위는 강요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견제기구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면 역사의 아이러니다. 주민 센터를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장에게 망신을 주는 주민대표가 돌출하는 이유는 견제의 임무를 벼슬이라고 착각한 데서 온다. 대의정치에서 국민의 대표는 선거 때 내세웠던 심부름꾼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오랫동안 심부름센터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거래처를 잘 유지할 수 있는 교양과 마케팅 능력이 우선돼야 한다. 소리 없이 존경과 권위를 쌓아가는 심부름센터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희망이다.

 

지금은 얕은 상식의 융합이 창조산업으로 각광받는 시대다. 아무리 많은 독서를 한다고 해도 그걸 써먹지 못하면 죽은 지식이나 다를 바 없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했다. 배운 즉시 쓰지 않으면 언제 무용지물이 될지 모를 만큼 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배워 좋은 곳이 쓰라고 했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겠지만, 시대문화는 당대의 교양을 통칭한다. 교양이나 지식은 변한다. 상식도 변한다.

 

다양한 교양들이 융합하는 시대

 

‘문화의 세기’란, 다양한 교양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창의적으로 융합되는 사회 현상의 총칭이다. 융합은 평등하고 수평적인 가치 기준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문화의 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교양과 예술, 자연과 기술이 전통과 미래와 섞이면서 한 편으로는 혼돈, 다른 한 편으로는 희망을 연출하는 것이 생활문화다. 대중적 창의성은 보편적 생활문화에 누군가 비상식적 아이디어로 불을 지피는 순간 타오른다.

 

비상식적 아이디어를 보편적 상식으로 구현하는 이들이 오히려 권위와 존경을 누리고 있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세계인들의 박수를 받는 스티브 잡스가 청바지를 입고 세기적 인터뷰를 한다고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대중적 창의성에 불을 지피려면 권위주의라는 불필요한 껍데기부터 벗어 던져야 한다. 문화의 세기는 상식을 깨는 용기 있는 교양인을 기다린다.   강우현 남이섬 대표이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