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와이드섹션 하남시
하남시는 백제의 시조 온조가 현재 하남시 춘궁동(고골 또는 궁안) 일대에 도읍을 정한 곳으로 역사의 깊이가 남다른 곳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진평왕 26년(604) 이곳에 한산주(韓山州)를 설치했다 경덕왕 16년(757) 한주(漢州)로 고쳐 불렀다. 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를 광주(廣州 넓은 고을)로 고쳐 불렀으며 이때부터 광주라는 명칭이 붙기 시작했다. 조선 선조 10년 광주군 동부면에 편입됐고 지난 1980년 12월 동부읍으로 승격했다 지난 1989년 1월 광주군 동부읍·서부면과 중부면이 합쳐져 시 승격과 동시에 지금의 하남시로 부르게 됐다.
백제 첫 도읍지는 하남이었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여느 동네에선 접하기 쉽지 않은 아주 특별한 마을 이름들이 즐비하다.
궁안마을은 말 그대로 대궐 안에 백성들의 주거지가 있었다는 얘기다.
상사창동(上司倉洞)과 하사창동(下司倉洞) 등도 마찬가지.
왕궁의 곡식 등을 저장하던 창고(지금의 정부가 관리하는 곡식창고)와 연관됐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불리어진 명칭이 분명하다.
남한산성(북문) 산자락 바로 밑에 그 마을이 있다.
왕궁 주위로 관공서들이 즐비한 골목을 뜻하는 항(巷)자가 들어간 명칭도 예사롭지 않다.
천왕사지는 어떤가? 옛 절터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2만평 규모의 절터가 자리했다는 것은 그 규모로 따져 볼 때 종교적 의미도 있지만 왕과 그 귀족들이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 싶다.
이 이름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 거대하고도 웅장한 왕궁이 눈 앞에 우뚝 선다.
왕궁 한복판으로 지금의 운하 역할을 했던, 물자들을 실은 배가 통과할 수 있는 수심 깊은 하천도 흐른다.
이 개천은 바로 한강으로 이어지고, 서해로 연결된다. 바로 덕풍천이다. 물류창고와 운송통로. 뭔가 그림이 그려진다.
2천년 전 부여계 주민들을 이끌고 요동에서 남하한 온조와 그의 어머니 소서노가 한반도 중심에 깃발을 꽂았던 초기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BC 18년~AD 475년)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물론 하남시 춘궁동과 교산동 일대가 위례성이라고 정확하게 명시된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진 않았다.
현재 학계에선 잃어버린 초기 백제 도읍지로 하남 춘궁동(고골)이나 이성산성 일원, 몽촌토성, 또는 몇년 전 아파트를 짓다 유구와 유물 등이 다량 출토된 풍남토성(하남 인근) 등으로 보고 적잖은 논란과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백제 도읍지인 위례성은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과 교산동 일대로 추정하는데 머뭇거리고 싶지 않다.
막연한 추정이 아닌 여러 고대 문헌과 유구와 유물, 지리적 관계 등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돌뿌리까지도 고스란히 도성의 흔적 간직
한민족의 첫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건국신화에는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할 때 한산(漢山)에 올라 본 열 신하들은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향하려는 비류에게 이처럼 간언했다. ‘북으로는 한수(아리수)를 끼고 동으로는 산으로 둘러 쌓였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는데다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천연의 요새로 된 좋은 땅을 다시 얻기 어려우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온조는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고 이 말을 듣지 않은 비류는 백성을 나눠 미추홀에 정착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하남시 춘궁동과 교산동 일대에선 최근에도 한성백제 도읍지로 추정될 만한 유물과 유적지 등이 적잖이 발견, 또는 발굴되고 있다.
먼저 동쪽에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해발 657m)이 있고 서쪽에 이성산성(二聖山城:해발 207m), 남·북쪽에 한강과 비옥한 평야 등이 펼쳐져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0여년 전 검단산 정상 부근에선 동명성왕(주몽)에 제(祭)를 지냈던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고, 이보다 앞서 당시 도읍지 방어시설로 보이는 이성산성 정상에서도 천단(天壇)과 지단(地壇) 등으로 여겨지는 8~9각 건물지가 발굴됐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원년(BC 18년) 동명묘를 세웠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됐으며 이후 나라에 우환이나 왕이 등극한 정월에 왕이 직접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8차례나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또 고이왕(8대) 10년 대단(大壇)을 설치, 제를 올렸는가 하면 근초고왕(13대) 2년 천지신에게 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는 이성산 정상에서 천단과 지단으로 추정되는 8~9각 건물지가 발견된 점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건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이다.
하남시 춘궁동 왕궁지(터) 남쪽엔 천왕사지(天王寺址)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고골저수지:이성산성 앞)으로는 동사지(桐寺址) 등이 오래 전에 발굴됐는데 사찰 이름과 불사흔적, 규모, 위치 등으로 미뤄 건립시기를 한성백제로 보기에 충분하다.
왕궁지 남쪽 하사창동에 위치한 천왕사는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왔다는 게 사료를 통해 확인됐으며 규모면에서도 1만~2만평에 이르는 큰 사찰이다.
특히 이곳에서 사리공이 뚫린 가로와 세로가 각각 160㎝와 140㎝ 크기의 석재가 발견됐는가 하면 주변에는 전탑(塼塔)에 흔히 사용되는 벽돌(塼)이 흩어져 있다.
백제 불교가 왕실불교로 정착됐다는 점에 대해선 부정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이는 곧 한성백제 왕궁 주변에 불사(佛寺)가 여러곳에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당시 고대 국가의 틀과 1만~2만평 규모의 천왕사 건물 크기에 비춰 바로 도읍지(왕성)라고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하남시 춘궁동은 ‘궁안’또는 ‘궁말’등이라고 불리웠다.
이 명칭을 토대로 하남 사람들은 오랜 동안 백제의 왕궁지가 있던 곳이라고 믿어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이병도 박사가 춘궁동 일대가 백제의 왕궁지라고 추정했기 때문에 하남 사람들의 그 믿음을 뒷받침했고 지금까지도 이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김세민 하남시 문화체육과 박물관팀장은 “춘궁동 일대의 전체적인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고 백제시대의 유물이 잘 출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정할 순 없지만,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의 도미부인 설화와 관련해서는 장소가 서울 강동구나 송파구가 아닌 하남 창우리 근처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지명들을 살펴볼 때 춘공동 일대가 한성백제 도성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며 “유적지 대부분이 사유지인데다 그나마 남아있는 유물 등의 훼손 정도가 심해 문화재청 등 정부 차원의 발굴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하남=강영호기자 yhkang@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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