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출판史 99년’ 보진재를 아시나요

99년의 역사를 가진 인쇄·출판사 보진재(寶晉齋)를 아시나요? 지난 2002년 8월15일 창립 90주년을 맞아 파주출판도시의 첫 입주사가 된 보진재. 나는 우리 출판사가 보진재와 이웃하여 책을 만들게 돼 행복합니다. 파주 출판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보진재의 존재를 늘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올해로 창립 99주년을 맞는 보진재가 경이롭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이 땅의 출판·인쇄 문화사를 증언하는 보진재의 존재와 발전은 곧 우리 모두의 긍지이자 희망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일제·한국전쟁 꿋꿋이 자리 지켜

 

보진재는 자운 김진환(子雲 金晉桓) 선생에 의해 1912년 8월1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근대 한국미술사의 거장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보진재’ 당호(堂號)를 당대의 명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선생이 쓰도록 했습니다. 자운 선생과 성당 선생은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1874년 서울에서 태어난 자운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는데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교과서 편찬작업에 10년간 종사하다가 문아당인쇄소 석판부에서 석판미술 인쇄술을 익힙니다. 그리고 스스로 보진재를 창립해 민족문화의 아름다움과 민족정신을 널리 표현해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시대를 거치면서도 스스로의 자세를 지켜온 보진재가 인쇄한 수많은 책과 잡지들을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은 반듯한 정신과 건강한 민족문화를 인식했을 것입니다. 책의 미학과 권능을 보여주는 기업이었습니다. 보진재는 일제 말 조선어학회의 의뢰를 받아 조선어 사전의 제작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이윤재·이극로·최현배 선생 등을 잡아가는 바람에 사전작업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분들로부터 건네받은 조선어사전의 원고를 비밀리에 잘 보존시켰습니다. 해방 후 원고는 한글 학자들에게 인도돼 ‘한글 큰사전’이 간행됐습니다.

 

6·25전쟁으로 보진재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지만 피난 수도 부산에서도 인쇄작업은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1968년부터는 출판도 병행해 인쇄·출판사로서 보진재는 새로운 역사를 걷게 됩니다. 보진재는 창립자 김진환 선생에 의해 이어 아드님 김낙훈 선생이 제2대 사장을 맡았고, 다시 손자 김준기 선생이 제3대 사장을 맡았습니다. 제4대 김정선 사장은 김진환 선생의 증손자입니다. 1992년부터 경영을 맡고 있는 김정선 사장의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가 출판도시에서 일하는 출판인·인쇄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보진재가 제작해내는 수많은 책들과 인쇄물들이 우리 인쇄 문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아랍·아프리카·동유럽·중국 등 세계의 100여 문자로 인쇄·제작되는 성서는 정말 아름다운 책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박엽지로 인쇄된 성서들이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쇄 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담아내는 인쇄 문화를 창출해내는 보진재의 공장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참 좋은 현장학습이 될 것입니다.

 

민족 문화 100년 대변하는 유산

 

보진재는 내년이면 창립 100주년을 맞습니다. 출판도시에서 일하는 출판인·인쇄인들은 지금 ‘보진재 100년’을 위한 준비위원회 같은 것을 토론하고 있는 중입니다. 보진재의 100년사는 우리 민족문화의 100년사이기 때문입니다. 보진재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보진재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년 8월15일 보진재 창립기념 잔치에는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중요한 분들을 모두 초청하고 싶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축제의 마당을 만들고 싶습니다. 상투적인 잔치가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삶과 문화를 생각하고, 한 시대의 사상과 정신을 진동시키는 아름다운 출판 문화의 역량을 의식하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는 문화계·교육계·경제계 인사들뿐 아니라 대통령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김언호 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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