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수석채집이 취미이신 교우 한 분이 멀리 가서 구해온 것이라면서 까맣게 생긴 돌덩이 하나를 받침대와 함께 가져오셨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것이라 목사인 나에게 선물하고 싶어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평범한 돌덩이로 보일 뿐인데 그분은 연신 감탄을 하면서 너무너무 아름답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수석에는 문외한이라서 별 느낌이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분은 더욱 열심히 설명을 한다. 움푹 파인 쪽을 가리키면서 이쪽의 기암절벽과 절벽 끝에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를 보라는 등, 실선 하나를 가리키면서 이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는 등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나에게는 별로 느낌이 오지를 않는다. 한참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 듯도 해 보이고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역시 나에게는 수석을 보는 심미안이 부족하다. 사람은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게 마련이다.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처럼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또한 둥글게 만들어진 세상은 쉼 없이 자전과 공전을 하며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 때문에 세상의 구조는 이중적이며 또한 복합적이다. 이 세상은 낮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밤이 있고 아침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저녁이 있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도 이중적이며 동시에 복합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 한편에서는 한겨울을 지내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여름을 지내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한낮을 살아가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한밤중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단면으로 생각하기보다 이중적으로, 아니 복합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해를 맞이했지만 세상은 여러 가지 일로 가득 차 있다. 보이는 것마다 어려운 일이고 들리는 소식마다 마음을 어둡게 하는 답답한 소식들이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크고 작은 재난과 사건, 사고의 소식들은 우리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근심되게 만든다.
며칠 전 교우 한 분이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남의 빚보증 잘못 서줘서 큰 어려움을 겪고 난후에 집까지 다 없애고 부부가 아들 하나 데리고 트럭으로 생선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가정의 가장이다. 날씨는 추운데 감기 몸살이 겹쳐 장사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목사님! 온몸이 쑤시고 곧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잘 버틸 수 있도록 목사님 기도 좀 해 주십시오.”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 코끝이 찡하다.
‘서 있어야 할 곳’ 바르게 인식해야
세상은 복합적이고 인간의 사고 구조도 복합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절망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밤은 더 큰 절망일 것이다. 새 아침, 새해, 새날은 더 큰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소망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오늘은 내일을 위한 쉼의 은총이다. 그 사람에게 오늘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새로운 디딤돌일 것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워 옴을 느끼며 한겨울은 만삭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을 바르게 인식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50여 년 전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3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는 이런 동시가 실려 있었다. “봄아, 봄아 오너라. 어서 오너라. 봄이 되면 나는, 나는 새로 4학년. 입김으로 호호 유리창을 흐려 놓고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써보는 글자들, 봄, 꽃, 나비” 산촌의 추운 겨울밤 큰 소리로 밤새도록 읽고 또 읽으면서 꽁꽁 얼어붙은 대지 아래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새로 4학년이 되는 날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을 단면이 아니라 둥글게 만드신 그 분 앞에 서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반종원 목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