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찢겨져 나가고 12월 한 달 남아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이 무엇엔가 쫓기는 듯 마음을 더욱 더욱 뒤숭숭하게 만드는 오후, 자동차 운전 중에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된 한 여성 개그우먼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녀가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회사에서 특강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 자신은 죽으면 묘비에 적을 비문을 미리 정해 놓았다고 했는데 그 내용은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했다고 했다. 방송을 들으며 혼자 한참을 웃다가 생각하니 의미가 있는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웃기자고 하는 개그이지만 무언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남을 웃기는 일이 직업이다. 그 웃기는 일을 평생 천직으로 알고 웃기는 삶을 살다가 죽겠다는 의지가 담긴 내용이 아닐까 생각하니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오늘의 모습은 지나온 삶의 결과
사람은 죽으면 모두 무덤에 자빠질 것이다. 돈을 벌려고 동분서주하다가, 정치를 하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웃다가, 울다가, 싸우다가 자빠질 사람 등등 각자 자기의 직업에 따라 하던 일을 멈추고 자빠질 것이다. 단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거기에 자빠져 있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 예외 없이 자빠질 사람들이다. 인생은 살아온 삶을 모두 종합해 행주를 짜듯 꽉 짜면 두 단어가 남는다. 하나는 ‘감사’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후회’라는 단어이다. 어떻게 살다가 자빠지면 후회가 없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반드시 옳은 말은 아니다. 죽은 자도 말을 한다. 흔히 지나간 세월을 허탈해 하고 내 인생가운데 다 흘러간 것으로 치부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시간과 세월은 절대로 흘러 없어진 것이 아니다. 내 인생 가운데 고스란히 축적돼 내 안에 있다. 오늘의 내 모습은 지나온 내 삶의 결과이다. 지난날의 내 삶의 이야기는 오늘 감사로 귀결되기도 하고 후회라는 단어로 남기도 한다. 그러기에 인생은 죽어서도 말을 한다. 무덤에 자빠진 후에 일간지의 한줄 머리기사로, 혹은 사람들에게 한마디의 단어로 오르내리기도 한다.
나는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평생을 설교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설교하다가 자빠질 사람이다. 더 나아가 자빠져서도 설교할 사람이다. 설교자는 죽어서도 설교자이다. 살아서도 좋은 설교자여야 하고 무덤에 자빠진 후에도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준 설교는 무덤에 자빠진 후에도 여전히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설교자이다. 살아서 뿐 아니라 무덤에 자빠져서 설교할 사람들이다.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돈은 이런 것이라고, 명예와 권세는 이런 것이며 그래서 인생을 후회 없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할 사람들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은 무덤에 자빠져 외칠 설교 원고를 쓰는 것이다.
감사하며 후회없는 인생 살아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원고를 써야 할까? 지금도 자빠져서 설교하는 두 분에게서 배우고 싶다. 한 분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다 알만한 ‘솔로몬’이란 분이다. 그는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지혜의 마음’을 구했다. 지혜의 마음의 의미는 ‘듣는 마음’을 의미한다.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듣는 지혜를 구했다. 또 한분은 솔로몬의 친구 ‘아굴’이란 분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고 했던가, 솔로몬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솔로몬은 그의 자서전 격인 잠언 서에서 그의 친구 ‘아굴’의 기도문을 소개한다. 그는 평생에 두 가지 소원이 있다고 기도한다. 하나는 “평생에 진실한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라는 것과 “겸손한 삶을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해 끝자락에서 두 분의 기도를 마음에 담고 기도의 손을 모은다. 반종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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