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에 세탁소에 다녀온 아내가 옷가지를 정리하다 말고 짜증을 부린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이유인즉 세탁소 주인이 세탁물을 잘못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집에 거래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우리 세탁물을 모르느냐는 것이다. 10년 아니라 20년을 다녔어도 모를 수도 있는 것이지 무얼 그러느냐고, 그런데 무슨 세탁물이 바뀌었는데 그러느냐고 했더니 당신 바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지를 보니 바뀐 것 같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 바지 내 것 맞는데?” 했더니 아내가 대뜸 “당신 바지가 왜 이렇게 짧아요?”한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 나는 아내보다 키가 좀 작은 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연애를 했고 아주 오래 동안 교제를 한 끝에 결혼을 했다. 한마디로 말해 아내의 눈에 콩깍지가 씌인 것이었다. 이 콩깍지는 결혼 생활 30년이 넘도록 벗겨지지를 않아 무탈하게 삼남매를 낳고 키우며 잘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 콩깍지가 벗겨져 남편의 짧은 바지가 눈에 들어왔단 말인가? “당신 바지가 왜 이렇게 짧아요?” 이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아내의 눈에 콩깍지를 다시 씌워 주소서!’ 감사하게도 그 기도는 순적이 응답이 되어 오늘까지 큰 변고 없이 살아오고 있다. 결혼상담소에서 키가 165㎝가 안 되면 아예 상담도 안 받아 준다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나는 큰 행운아이고 시대를 잘 타고난 사람이다.
숏다리인 나 30년째 몰랐던 아내
나는 직업상 주례를 많이 하는 편이다. 요즘 결혼 풍습은 이벤트성으로 변질돼 요란스럽고 왁자지껄해 주례사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지만 주례를 맡은 당사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신성한 결혼예식을 통해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 간절하기 때문이다. 우선 결혼은 결혼식이라고 하는 이벤트로 다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축포를 터트리며 결혼식을 마친 후 비행기 타고 괌으로 신혼여행 가서 야자수 나무주위를 돌면서 “나 잡아 봐라” 하고 며칠 놀다가 온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생활로 연결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 일생을 살아가는, 그래서 일생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결혼 전에는 홀로 한 인생을 살다가 결혼을 통해 둘이 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홀로남아 먼저 간 사람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홀로 두 인생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결혼은 생활이고 인생이다. 그 기간이 얼마 동안인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결혼한 속도만큼 계속 단축될 뿐 절대로 연장되는 법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당위가 여기에 있다.
둘이 하나 된다는 건, 그런것 아닐까
결혼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결혼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된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서로 이런 약속을 했다. “내가 밖에서 힘든 날이면 집 현관을 들어설 때 넥타이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 들어 올 테니 그때에는 당신이 나를 위로해 주고 당신이 힘든 날이면 내가 오는 시간에 앞치마를 왼쪽 옆으로 돌려 입어요. 그러면 그날은 내가 당신을 위로하겠소.” 이 일은 잘 지켜졌고 행복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퇴근해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왼쪽 어깨에도 넥타이가 걸쳐 있고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의 앞치마도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나란히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생은 일생이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화폭의 그림도, 쓰던 원고지도 맘에 안 들면 다시 그리고 쓸 수가 있다. 시험에는 재수, 삼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일생이다. 한 번뿐인 인생, 그래서 아름답고 소중하다. ‘나는 행복해야 해’ 강박관념에 매이지 말자. 당신의 짧은 바지에서 시선을 돌려 창을 열고 함께 하늘의 별을 헤아려 보자. 반종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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