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면 어떤 것 주변에는 그 어떤 것을 에워싸고 맴도는 것들이 있다. 옛날에도 평생을 두고 어느 누구 곁을 맴돌다 말 한번 못해보고 죽어버리는 총각 처녀들의 상사병은 죽음 그 후에도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남겼다. 무엇 때문에 자꾸 맴돌게 되는 것일까?
맴돌기 시작하면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춘다. 먼 곳은 바라볼 생각조차 안하고 다른 것들은 아예 관심 둘 겨를도 없어진다. 맴도는 순간은 맴돌기 이상으로 마음을 끄는 게 없다. 그런데 이 맴돌기가 끝내는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걸 수없이 본다. 늘 거기서 맴돌다가 거기서 무엇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이 혐오스럽기까지 한 집착이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 그것이 끝을 보고 있다.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질병과도 같은 것이다. 곤충들은 죽을 때가 되면 날개를 치며 땅에 등을 대고 맴돈다고 한다. 즉 맴돌기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어떤 사회적 계층도 그 나름대로의 관심의 대상을 갖고 있다. 예술가에 있어서는 더욱 습관의 표현처럼 나타난다.”
관심이 생기면 주변을 맴돌게 돼
여러 가지 형태의 정열과 호기심을 가지고 많은 예술가들은 자기의 영역에서 맴돌기를 해왔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문학, 그 주변에서 무거운 몸으로 맴돌기를 해온 것 같다. 상사병에 걸린 옛날 청년처럼 짝사랑에 지친 젊은이들처럼 그 주변에서 오랜 시간 맴돌다 때로는 잠들기도 했다.
이렇게 정신이 원하는 맴돌기의 형태를 그 누구도 막거나 해결해 줄 수 없다. 그 까닭은 자기가 아무런 목적 없이 하고 싶고, 그걸 떠나서 다른 것에서는 별 의미가 느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우리들의 감각에 와 닿는 심상은 우리들의 정신 속에 보존된다. 이러한 심상들은 어떤 육체적 상태에 의해서 환기된다.
그러나 전화를 끊는다고 해서 상대방의 정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맴돌기가 설사 멈춰도 그것 자체가 맴돌기로 연결된다. 맴돌기의 형태가 바뀐 또 하나의 맴돌기인 것이다. 문학에 대한 나의 맴돌기, 그것은 영혼 불멸의 가설. 그러나 가장 진실답게 단 하나 전해질 수 있는 나의 관습의 미적 표현이기도 하다.
한번 정치의 맛을 느껴본 사람들은 정치판에서 맴돌기를 시작하고 돈맛을 느껴본 사람들은 돈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기를 한다. 이 맴돌기는 현실의 불행을 인지하면서도, 또 자신의 욕망과 기획을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도 멈추거나 결단할 수 없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어딜 맴돌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맴돌기는 공격성이나 돌발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갑자기 총을 겨누지는 않지만 한번 히죽 웃고 사라지는 일은 절대 없다. 시인이기 때문에 시 작품 안에서 예를 들 수밖에 없다. 백무산의 다음 시는 그의 문학이 얼마나 노동 속에서 맴돌았는가를 우리에게 느끼도록 해준다.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 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 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 쓰일 대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이’ <노동의 밥 1연> 80년대와 90년대를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 곁에서 맴돌았던 그는 노동자의 칠흑빛 현실인 밥을 통렬히 노래한다. 생동하는 삶은 밥에서 나온다. 밥 근처에서 간절히 맴돌고 있는데 밥을 빼앗긴 분노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가슴이 터져 나오는 힘으로 생명인 밥을 지키고 있다. 그들 주변을 맴돌지 않고서는 아무나 쓸 수 없는 시다. 노동의>
오래 맴돌다 보면 맴돌기의 틀은 너무나 견고해진다. 그 억압성은 보이지 않지만 맴돌기는 맴도는 자 가장 깊은 자리 안에 의미로 존재하고 있다. 나의 맴돌기는 어떤 자리였는지 이 계절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최문자 협성대 총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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