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는 오아시스와 거짓이라는 사막

기억이 이성적이라면 추억은 감성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논리적 근거와 추론을 통해 우리에게 재생되는 반면, 추억의 대부분은 한편의 동화같이 또는 한자락의 유행가 가사처럼 떠오른다. 추억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학창시절일 것이다. 사고뭉치였던 내게도 학창시절의 추억 만큼은 아름답고 기꺼이 되뇌이고 싶다.

 

다만 두 가지 기억은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는 소위 HR시간 만큼은 학급운영에 대한 자유로운 의사개진이 허용돼 몇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게 문제가 돼 일주일 동안 반성문 썼던 일, 다른 하나는 학급에서 발생한 문제의 원인 제공자를 무기명으로 적어내라고 했는데, 결과는 대부분의 반 친구이름이 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평상시 문제아였던 필자가 누명(?)을 쓰고 또 일주일동안 반성문을 쓴 사건.

 

두 기억의 공통적 문제점은 사실에 대한 의견제시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단지 학교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영역에서 의사표현 또는 비판의 자유가 제한적이었고 또한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때문이라고 이해하자. 그렇다면 과연 현재 한국사회에서 의사표현의 자유와 그에 대한 보호는 존재하는가.

 

익명성 존중이 지나친 사회

 

여기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의 거대담론을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일련의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면, 우리의 방송은 가명이나 이니셜, 모자이크나 변성처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한 사안에 대한 담당자나 전문가의 의견조차도 변성처리 돼 보도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주장과 비판조차도 익명으로 처리되는 것을 개인정보 보호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사회가 ‘익명성 존중이 지나친 사회’이기 때문일까. 나는 후자라고 본다. 이와 같은 지나친 익명성 강조는 한국사회의 세가지 특성에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 토론문화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토론은 진위 확인의 목적보다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다. 따라서 토론의 중요한 전제는 타자에 대한 인정과 주장에 대한 수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문화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소위 거짓과 악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의사개진의 망설임이 있는 한, 익명성은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의사표현의 자유 필요해

 

둘째, 비판문화의 부족에서 기인된다. 대표적 비판사회학자인 아도르노는 비판을 위한 비판조차도 필요하다고 한다. 비판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자 추진력이다. 그러나 여당의원이 정부를 비판하는 것, 공무원이 장관을 비판하는 것이 타부시 되는 사회라면, 당연히 익명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셋째, 정보 제공자에 대한 신변안전보호대책 부족 또는 불신에서 기인한다. 물론 여기서 (범죄)정보제공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제보자까지도 공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한 국회의원의 성추행 기사화에 대한 기자의 망설임, 또는 (피해)사실공개에 대한 대학생들의 불안 등은 정부의 신변안전보호책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하고, 익명성은 점점 강조될 수 밖에 없다.

 

개인생활의 자유와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익명성 옹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표현의 자유가 닫힌사회이기 때문에, 또는 신변안전보호가 부족한 사회이기 때문에 익명성이 추구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진실이라는 오아시스’는 점점 더 사라지고 ‘거짓이라는 사막’은 늘어날 것이다.  최순종 경기대학교 청소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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