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설계사’ 꿈꾸는… 재선 도전 첫 경기도지사

<경기지사 후보 스토리>기호 1번 한나라당 김문수 그는 누구인가…

국회 의원회관 316호.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가 내리 12년간 국회의원하면서 지내던 사무실이다. 이 곳에 살던 김 후보는 술 한잔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일만 하는 부천 소사 머슴이었다. 동료 국회의원들은 지금도 ‘일벌레 김문수’만을 기억한다. 여전히 김 후보는 일벌레다. 날이 바뀌어야 잠에 든다.

 

4년간 경기도 곳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김 후보는 수십여년 전 노동현장의 그늘진 얼굴들을 되새겨본다. 천형(天刑)을 받아 평생을 숨죽여 살던 사람들과 막노동판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인부들, 아이 분유값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미혼모의 손을 잡았던 김 후보는 ‘돈이 없어 굶는 아이들이 없어야 하고 치료비가 없어 병원을 못가는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판잣집과 찢어진 고무신

김 후보는 4남3녀 중 여섯째다. 고향은 경상북도 영천군 황강면 임고리. 그다지 어렵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낸 김 후보는 10살 때부터 판잣집에 살게 됐다.

 

문중일만 챙기던 아버지의 빚보증 때문이었다.

 

김 후보는 “둥근 밥상에 호롱불을 피어놓고 7남매가 공부를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면서 “어지간한 일에는 기가 죽지 않았지만 천정 틈새로 하늘의 별이 보이는 집에 친구나 선생님이 오는 일이 반갑지는 않았다”고 기억했다.

 

이처럼 어려운 가정 형편은 명문 학교인 경북중와 경북고를 졸업했지만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김 후보가 기대했던 20살대학 캠퍼스의 시작은 해진 남방과 찢어진 고무신이 전부였다.

 

공장 노동자 김문수

 

그러나 김 후보는 서울에서도 판잣집을 보게 된다. 배고픔뿐 아니라 배설욕구 조차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김 후보는 세상을 뒤집어야겠다는 끓는 피를 느끼게 됐다.

 

행동하는 운동권으로 데모에 가담하던 김 후보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주선으로 구로공단에 취직하면서 노동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펜대만 잡던 손으로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김 후보는 노동운동을 위해 자격증을 따고 열관리기능사부터 전기기계기능사까지 8개의 자격증을 갖고 있다.

 

지금도 김 후보는 은퇴 이후에도 걱정이 없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국가공인자격증 보유자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을 한일공업노조,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대원전기, YKK 등 노동파업 현장에서 보낸 김 후보는 가장이 되고서도 88년 올림픽경기까지 노동현장이나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사회발전 뿐 아니라 동구권의 몰락으로 김 후보의 신념은 변하게 된다. ‘사회주의 실패’를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치인 김문수

김 후보는 장기표씨 등과 민중당을 결정, 정당정치를 통한 사회개혁에 나섰지만 현실정치의 쓴맛을 본 뒤 민주자유당에 스카웃된다.

 

김 후보는 “민중당을 통해 현실정치의 쓴 맛을 보았다”라며 “각계의 권유뿐 아니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개혁 정책이나 마인드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당시 배경을 설명했다.

 

15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인 박지원 의원을 꺾고 전국 스타로 떠오른 김 후보는 이후 내리 3선을 거치면서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국정감사 우수의원’, 사무부총장, 공천심사위원장 등 평생 써보지 못했던 많은 감투를 쓰기도 했다.

 

특히 김 후보가 국회 핫 스타로 떠오른 사건이 있었다. 결식아동 급식과 관련해서다.

 

어릴 적 죽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랐던 김 후보에게 학교 급식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후보는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고 신한국당 정책위원회에도 문제를 제기하여 학교 급식 법을 세 번이나 고쳐가며 급식예산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3당 원내 총무들이 모여 추경예산안에서 결식아동 급식 예산비를 삭감하려하자 회담장을 박차고 들어가“밥 굶는 아이들에게 왜 밥을 주지 않는가. 아이들이 유권자가 아니라고 이래도 되는 거냐”며 거칠게 항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결식 의원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바꾸자

지난 2005년 7월 수도 이전 반대 활동에 여념이 없던 김 후보는 손학규 전 지사로부터 경기지사 출마를 권유받게 된다. 그러나 김 후보는 고민했다. 아내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김 후보는 출마를 결심했다. 김 후보는 “손 전 지사의 제의를 받고 경기도를 다녀 보니 할 일도 많고 제가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됐다”며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경기도를 세계 속의 심장으로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 후보는 “4년 임기를 지내면서 생각해 보니 경기지사에 출마한 결심은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치열한 당내 경선과 진대제 전 장관과의 경쟁에서 승리, 경기지사에 취임한 김 후보는 4년간 관용차로만 23만㎞를 달렸다.

 

지구 6바퀴를 돈 셈이다.

 

경기도 곳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김 후보에게 집 옆에 군부대가 있어서 화장실도 못고치는 노인, 수도가 없어 공장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가, 돈이 없어 병원도 못가는 모녀...

 

김 후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또 이들과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김 후보는 “어릴 적부터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며 “인생의 굴곡이나 큰 결정은 내가 아닌 남으로부터 이뤄졌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못 다 이룬 약속을 위해

하지만 김 후보는 아직도 4년의 임기가 짧고 시간이 없다. 아직도 못한 일들이 많다고 한다.

 

그동안 여의도 면적의 8배나 되는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 개발제한구역 112㎢의 합리적 조정, 상수원 공장입지 제한거리 대폭 축소 등을 이뤄내고 글로벌 메카시티를 위한 광역급행철도(GTX)가 눈에 펼쳐지고 있지만 김 후보는 만족하지 못한다.

 

김 후보는 “글로벌 시대에 대한민국은 아주 작고 힘없는 나라일 수 있는데 이 조그만 나라에서 우리, 아니 자손들이 먹고 살아갈 길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면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한민국, 그 시작을 경기도에서 만들고 싶고 경기도의 희망을 그리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결혼과 가족< p>

 

수배자 시절 부인 만나 청첩장도 없이 결혼식 집회 오인…경찰 출동

 

김문수 후보의 가족은 모두 3명이다. 4남3녀의 김 후보이지만 김 후보에겐 부인 설난영씨와 딸 동주양이 인생의 주인공이다.

 

김 후보와 설씨의 러브스토리는 80년대 말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배자 신세였던 김 후보는 갈 곳이 없자 알고 지내던 설씨의 자취방에 숨어들게 됐다. 남여간 구별이 지금보다 엄했던 시기에 한지붕에 청춘남녀가 살게 되면서 정이 생겼는지 김 후보는 설씨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김 후보는 “아마 그때 아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찾아간 것 같은데...”라며 지금도 부끄러운지 말을 흐렸다.

 

가진 재산은 몸이 전부였던 김 후보는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설씨에게 끈질기게 구애했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냐’는 전략이 통했다.

 

김 후보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격언”이라며 “임기 중 중앙정부가 경기도 요구를 안 들어주면 프러포즈 할 때를 생각을 하곤 했다”고 귀띔했다.

 

드디어 결혼에 성공한 김 후보. 노동운동가 부부답게 봉천동에서 웨딩드레스도, 청첩장도 없이 결혼했고 결혼식을 집회로 오인한 전경버스와 경찰들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김 후보는 지금도 설씨를 끔찍이 아낀다. 남들 다 해주는 호강 한번 제대로 시켜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에 당선돼서도 부천 한신아파트 안 작은 아파트에 살았고 비싼 옷 한벌 해준 적이 없다.

 

결혼 초기에 많이도 싸웠다고 한다. 어릴때유교적 교육을 받았던 기억 때문인가. 김 후보는 젊은 시절엔 ‘남자가 위, 여자가 아래’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딸 동주가 있어 김 후보는 깨인 아빠가 되었다고 자평한다. 동주양이 어릴 적 쫓기고 구속되고 일만 해서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했다는 김 후보는 “기특하게도 맑고 밝게 커 준 동주가 고맙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우리 딸도 시집가서 한 집의 아내로, 며느리로 살 생각을 하면서 남자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김 후보는 또 “30년간 온갖 시련을 극복했던 힘이 가족이었고 항상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될 것을 다짐하게 한다”며 “나의 꿈과 나의 길에 항상 가족이 함께 해줘서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김동식기자 dsk@ekgib.com

 

프로필

▲1951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 중·고등학교 졸업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 후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제적과 투옥 후 25년 만에 졸업

▲1971년 고향서 1년간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서노련 등 노동운동

▲1980년 남영동 대공분실연행·고문 후 구속, 서대문구치소 수감중 기소유예로 석방

▲1985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1986년 5·3 인천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2년 5개월 복역

▲1992년 노동인권회관 소장

▲1994년 서울대 경영학과 25년만에 졸업

▲제15,16,17대 국회의원(부천 소사)

▲한나라당 제1 사무부총장, 기획위원장, 공천심사위원장(17대 총선)

▲2006년 민선4기 경기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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