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 분명한 ‘盧의 남자’… 6·2선거 ‘盧風’ 핵심으로

<경기지사 후보 스토리>기호8번 국민참여당 유시민 그는 누구인가…

유시민을 따라다니는 말은 항상 극과 극을 달린다. 분파주의자, 철새 정치인, 촉새 등 약점이 될만한 단어들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원’이라는 강점까지가 그렇다. 반면 유시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오빠’, ‘형’, ‘유시민’으로 불리기도 하고, 만화 속에 등장하는 사슴 캐릭터를 닮았다고 해서 손밤비, 중국 유명 배우 양조위를 닮았다 해서 ‘유조위’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대비되는 별명을 가진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시민,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기에 이만한 ‘증명’도 없다. 이는 그의 삶이 항상 온갖 오해와 편견, 또는 변화시키고자 하는 세상에 맞서 살아온 인생이기에 다양한 수식어처럼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 파란만장한 삶 속에 비쳐진 유시민을 알기 위해서 세상에 쏟아져 나왔던 자료를 통해 이미 알려졌던, 혹은 알려지지 않았던 몇가지 이야기를 빌어 그를 짐작해본다.

 

벽장 속에 갖히는 고집쟁이

유시민 자신이 그의 어머니를 통해 기억하는 어린시절 이야기는 그는 가끔 벽장 속에 갖히는 고집쟁이였다는 것이다.

 

발단은 꽁치 때문이다.

 

어느날 밥상에 식구 수대로 꽁치가 올라왔다. 그런데 큰 토막를 먹고 싶었던 그에게 작은 꽁치가 돌아오자 그냥 밥도 안 먹고 징징거렸다.

 

‘큰 거 달라’고 하면 될 텐데 그냥 안 먹는다고 그랬단다. 그리고는 계속 징징거리고, 그러면 밥상머리에서 들어다 벽장 속에 넣어버린다. 이것이 그가 벽장에 갖히는 이유다.

 

유시민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한번 안 먹는다고 하면 죽어도 안먹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 얘기가 더 재미있다.

 

벽장에 갖힌 유시민은 또 다시 징징거리기 시작한다. 무서우면, 혹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꺼내달라고 할 법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제발로 나온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징징거리다 지쳐 벽장 속에서 잠이 들면 그때서야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꺼내서 안아 내오곤 했고, 그때 정신이 들어도 그냥 자는 척 했다.

 

어쩌면 그때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유시민이 가진 지금의 고집스러움이 말이다.

 

매맞기 싫어 시작한 공부, 수학책을 외우는 괴짜

유시민은 처음부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시골 초등학교 시설 100등쯤 했다. 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 학생이 400명이었단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들어가니까 학교에서 공부 못한다고 매를 때렸다. 그래서 그는 공부 못한다고 때리는 걸 지금도 아주 싫어한다.

 

안 맞으려고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영어 ABC, 알파벳도 모르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최대 난관은 수학이었다. 시험만 보면 영어는 90점, 국어는 한 70점, 수학은 한 30점 이렇게 나왔다. 수학공부를 아무리 해도 안 되고, 재능도 없고, 과외를 받을 돈도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수학책을 다 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명한 공통수학 정석, 수학1 정석, 그리고 해법수학 세권을 외웠다. 문제 유형을 외우는 것이었다.

 

결국 대학 본고사때 나온 수학 6문제를 거의 만점에 가깝게 맞았다. 그것도 검산까지 했는데 시간이 30분이 남더란다.

 

가난이 부끄러웠던 반항아

 

유시민이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할 무렵 반항끼도 나타났다. 두발자유가 없던 당시 머리길이가 2센치일 때다. 당시말로 손가락으로 집어서 올라오면 바리깡으로 고속도로 내던 시절이었다.

 

유시민은 “그때 불만이 고3 2학기가 되니까 이제 6개월만 있으면 졸업하는데, 계속 이렇게 빡빡 깎아놓았다”며 신경질이 나서 여름방학 마치고 등교할 때 당시로서는 긴 머리였던 스포츠를 하고 갔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밀기만 밀어봐, 내일부터 학교 안 나온다” 이런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났는데도 안밀렸다. 유시민의 심리상태를 파악한 학교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고 그 뒤로 선생님들이 머리 한번씩 만져보고 씩 웃고 지나갔다. 그때가 유시민이 그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할 때다.

 

한때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공교육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교사였고, “학교는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는 아버지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가난했다. 그가 살던 동네에는 빈민촌이 붙어 있었고, 동네 한 가운데 2층 양옥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게 어떤 문제가 되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변호사인 친구 집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두꺼운 바둑판을 처음 봤고, 윤기가 흐르는 거실 마루며 소파를 처음 접했다. 게다가 그 친구의 어머니가 아들 친구가 왔다고 내놓은 사과도 그렇게 예쁘게 깎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 유시민은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

 

일류대학, 사회에 대한 의식이 시작되다

유시민이 사회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대학을 다니면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그를 만든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 일주일에 3일 야학 교사를 하면서 한달 24시간을 일하고 6만원을 벌었다. 기숙사비가 2만1천원이고, 학교 등록금이 10만6천원 할 때이니까 무지무지하게 많은 돈이었다.

 

그런 가운데 구로공단에 있는 야학에서 유시민 또래의 여성노동자들을 가르치게 됐다. 그때 그 여성 노동자들이 받던 돈이 한달 2만1천원 정도였다.

 

“그 사람들이 일주일에 대개 한 60시간 정도의 일을 했는데, 한달에 240시간이니까 내가 일하는 시간의 열배였다”며 유시민에 비해 일하는 시간은 열밴데 그 사람보다 세배를 더 벌었고, 더 대접받는게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더란다.

 

사회가 이렇다는 것을 유시민은 그때 알았다.

 

유시민은 “그런 문제를 다 외면하고 그냥 나만 잘 먹고 잘 살기가 진짜 애들 말로 쪽팔렸다”며 “잘못됐다는 거 뻔히 알면서 한마디도 안하고 그냥 가면 내가 나중에 다 살고 나서 죽을 때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수배생활, 결혼, 그리고 현재

이제 유시민의 파란만장한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다.

 

대학 2학년 때 10·26이 발생하고, 학생회 부활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학생회 간부를 맡았던 유시민은 검거돼 군법회의에서 병역미필이라는 이유로 군대에 보내졌다.

 

군대 마치고 출판사에 한 1년 근무하다가 복학을 했고, 복학해서 한달 만에 또 잡혀가는 등 몇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지금 그를 따라다니는 전과기록은 이렇게 생겨났다.

 

마지막 수배가 풀리던 날 그는 여동생 친구이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유시민의 결혼 과정 또한 재미있다.

 

함께 운동하던 사이인 그의 아내는 함께 5년을 만났다. 그러던 중 그가 그냥 “나와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하고 물었고, 그럴만한 이유는 없다고 해 결혼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진면목이라고나 할까.

 

그 다음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것들이다.

 

시사평론가로 활약하던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을 지키겠다”며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2003년 재보선(고양·덕양갑)으로 국회에 입성하기 전 이해찬 전 국무총리 보좌관, 저술가, 교수, 방송토론 진행자 등 다양한 이력을 거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시민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지금 이후부터의 이야기는 그가 살아나가는 방식과 모습을 통해 또다시 짐작해 볼 뿐이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

정치적 경호실장 역할 ‘영혼의 쌍둥이’라 불려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후 수만명의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그때 수많은 군중 속에서 만났던 유시민은 붉게 충열된 눈으로 문상객을 맞이하는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정치적인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정치적 경호실장’ 노릇을 해 왔던 그였고, 그날 유시민은 그가 가장 있어야 할 자리에서 가장 서럽게, 가장 숨죽여 흐느껴 울고 있었다.

 

노무현과 유시민, 유시민을 말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시민의 정치적인 시작 또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내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심각해지던 때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과 함께 ‘국민후보 지키기 시민 운동’을 구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단순한 구상에 그치지 않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신당의 창당까지 이어졌다.

 

결국 그해 10월께 지금은 개혁당으로 더 많이 알려진 개혁국민정당이 창당한다.

 

그것도 뜻이 맞는 40여명이 각자 500만원씩 내놓은 2억원으로 만든 정당이었다. 사회적인 홀대가 말이 아니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런 정당으로 유시민은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대학졸업 후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보좌관을 한 경험도 있지만 단순히 수배를 풀어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측근들은 노 전 대통령과 유시민의 관계를 두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 ‘영혼의 쌍둥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이 떠나는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운 곁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최측근으로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장충식기자 jjang@ekgib.com

 

프로필

▲1959년 경북 경주 출생

▲1991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80년 서울대학교 총학생대의원회 의장

▲1988년 국회의원 이해찬의원 보좌관

▲2000년 MBC 100분토론 진행자

▲2002년 전)개혁국민정당 대표집행위원

▲2003년 제16대 국회의원 (2003년 4월 24일 ~ 2004년 5월 29일)

▲2004년 열린우리당 경기도당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2006년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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