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서산의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를 다녀왔다. 방문객이 많은 절 치고는 초라하기까지 한 개심사. 세심, 개심,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열고’. 이 말이 좋다. 그런데 더 좋은 건 본당 앞에 있는 배롱나무다. 껍질을 벗어버린 알몸의 죄 없는 그 나무가 좋다.
예닐곱 살쯤이었을 거다. 부산 피난 시절 엄마는 끼니를 위해 나물을 많이 뜯었다. 나물을 뜯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곳이 절인지 고택인지 분명치 않으나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그 무서운 집을 등지고 서서 나는 하늘을 온통 뒤덮은 그 나뭇가지 꼭대기를 머리를 뒤로 힘껏 젖히고 보았다. 그 나무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 앉아 퀴퀴한 냄새를 맡았다. 지금도 숨을 들이쉬면 그 때의 그 해묵은 냄새가 나는 듯하다. 그 나무의 가지들은 마디마디 각을 이루며 휘어져 있었고, 두 갈래로 갈라진 반쪽에서 있는 힘을 다해 꽃이 피었다. 붉은 꽃! 생전 처음 보는 꽃. 나는 정신없이 그 꽃을 바라보고, 엄마는 어느 아주머니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나무는 백일홍이라 했다. 그 후 일년초 백일홍과 이것을 오랫동안 나는 헷갈려 했었고 훨씬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나무가 배롱나무란 걸 알았다. 엄마는 그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해방이 되던 해 꽃이 피고 그 후 한 번도 피지 않았지만 그 나무를 아무도 베어버리지 않았다. 예부터 동네에 경사가 있을라치면 꽃을 피우는 상서로운 나무라서…” 그 때 그 나무는 한 쪽에서만 꽃을 피웠다. 그리고 전쟁은 끝나고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뻗고 싶은 방향으로 숱한 팔을 벌리고 모든 것을 보듬어 안으려는 듯한 개심사의 배롱나무, 자유분방한 모습의 그 배롱나무가 꽃을 피웠다. 개인에게, 동네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라치면 꽃핀다는 나 어렸을 적의 배롱나무가 생각난다. 개심사의 배롱나무도 꽃을 피우는 이유가 그것일까.
/김원옥 한국문화원聯 인천시지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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