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놀이 2편:조금만 덜 부끄러운 즐거움

지난 번 칼럼에서 주제넘게 좀 잘난 체를 하였다. 알고 보면 그다지 실체적 의미가 없는 숫자에 현혹되어 많은 사람들이 현상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요지였다. 그리고는 덜컥 글 말미에 탈출법을 대충 알고 있다는 듯 다음 번 칼럼을 기대해 보시라는 객기까지 부렸던 것이다. 많은 독자에게 증거 인멸이 어려운 문자로 해댄 잘난 체이니 이건 아내의 지청구만 참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켕기는 마음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그것이 억압과 공포의 군사독재일 수도 있고, 돈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경쟁이 치열한 시장일 수도 있고, 또는 모두가 멍청한 짓인 줄 알면서도 따르지 않기 힘든 대한민국 교육정책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가끔씩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그래서 한 없이 초라한 한 개인을 본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바를 찾기 쉽지 않은 경우 우리는 거대한 절망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실상 거대한 절망보다 우리네 갑남을녀의 삶을 더욱 지배하는 것은 (이를테면 숫자놀이에 얽매인) 일상화된 실망의 쌓여감이다. 때로는 이 정도면 아직 참을만하다고, 또 때로는 자그마한 손익계산에 귀찮음이 더하여, 그리고 아주 때로는 아는 새 모르는 새 의식이 무의식화 되어 우리는 켜켜로 실망을 쌓아가고 산다. 그리고는 어느 날 문득 거대한 벽이 되어 서있는 실망의 더미 앞에서 때늦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무기력을 느낀다. 하여 묻는다. 따분하고 지겹고 귀찮지만 서서히 어슴프레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실망의 더미에서 탈출하는 법은 없을까?

셋 중에 하나 밖에 없다. 싫으면 미련 없이 “쿨”하게 떠나라. 아니면 열정적으로 외쳐라. 그도 아니면 그냥 참고 살아라. “쿨”하게 떠나면 속은 시원하고 모양새는 깔끔하지만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누구는 애인 혹은 배우자를, 또 다른 누구는 도시를 혹은 조국을, 그리고 심지어는 제 목숨을 떠나기도 하지만 떠나가는 대가는 적잖다. 더 큰 문제는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인 경우다. 제 자식 조기유학 보냈다고 대한민국 교육체제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나만 미국산 쇠고기 안 사먹으면 광우병 문제가 저절로 해소되나? 하여, 외치게 된다. 때로는 열정적으로 또 때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이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인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에 기대어 촛불 한 번 들라 쳐도 벌금이 무서운 세상이고, 도지사 업무 수행이 문제 있다고 주민소환 투표장에 가려고 해도 이리 저리 얽힌 지인들 사정이 딱해진다. 누구는 연대와 참여를 외치지만 아직은 내 일이 아니라 어렵다. 그래서 에이 더럽다 하고 모르는 체 참고 살지만 어디 그 속이 편하겠는가?

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나 지사(志士)가 되고 운동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모두 그렇게 된다고 꼭 세상이 좋아진다는 보장 또한 없다. 그 대신 그런 사람들 생각하는 마음가지고 살면서 아주 부끄럽지는 않게 조그만 힘 보태고 거기서 제 혼자의 즐거움을 찾으면 된다. 촛불 들기 힘들면 촛불 든 이에게 박수 한 번 쳐주고, 지구온난화 걱정되면 자가용 대신 버스 한 번 더 타고, 정치가 마음에 안 들면 투표장에 한 번 더 가면 된다. 그러나 이 손쉬워 보이는 해법이 힘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살아가면서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를 자주 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생각하는 삶에서 나오는 조금만 덜 부끄러운 즐거움. 쉽고도 어렵다. 그래서 더욱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끊임없이 이런 삶을 사는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큰 바위 얼굴이 된다. /강명구 아주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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