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를 반영한 신조어를 따라 잡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한 때는 45세면 정년이라는 뜻의 ‘사오정’이 유행이더니만 ‘88만원 세대’를 거쳐 이제는 ‘청년실신’(靑年失信)이란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못하니 융자받아 낸 대학등록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여 실업자가 되기도 전에 미리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대학 다니던 70년대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 세대는 주머니는 가난하였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어려워도 졸업하면 취직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고 뭔가 노력하면 어떡하든 이룰 수 있다고 믿던 시대였다. 지금은 당시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참으로 풍요로운 시기임에도 어찌된 노릇인지 이 시대 청년들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참으로 가난하다. 어학연수는 기본이고 각종 자격증에 해외봉사까지 이른바 스펙으로만 치자면 내 세대는 지금 청년세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가히 “풍요속의 빈곤”이다.
우리만 그런가 하니 그렇지도 않다. 성년이 되고나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 이른바 캥거루족이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급증 추세란다. 모두 제레미 리프킨의 저작 ‘노동의 종말’을 증언하는듯하다. 생산은 늘어도 일자리는 주는 이른바 일하는 20과 일할 수 없는 80의 시대가 이미 도래하고 있다. 삽질하는 경제정책으로는 결코 해결 불가능한 상황이다. 사고의 틀을 바꾸는 이른바 파라다임 쉬프트가 절실한 시기이다. 허나 바랄 것을 바라야지 앞으로 몇 년간 이 정부에 요원한 주문은 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다. 그래도 절망을 앞세우기에는 희망이 너무도 필요한 시기이다. 내 마음 깊숙하게 자리한 어느 후배 얘기로 요즘 파김치가 된 세대에게 ‘희망이라는 편견’을 접종하고픈 마음이다.
40대 후반이 된 이 후배는 한 때 이른바 386의 선봉에 서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던 열혈청년 시절이 있었다. 그의 꿈은 능력에 따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사독재의 억압에 맞섰고 끝내는 모스크바의 어느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밟는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탱크 위에서 포효하며 역사를 밀고 나가던 옐친과 러시아 사회의 실제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난 후 환멸을 느끼고 귀국하여 국내 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허나 그를 기다리던 세상은 요즘 젊은이의 취업시장과 같았다. 대단한 문장력과 학문적 열정에도 불구하고 이리 저리 떠돌다 자신의 몸이 병든 것을 알았다. 파킨슨씨 병이었다. 약에 의존하지 않으면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게 되고 말도 어눌해졌다. 더 늦기 전에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하고 싶었다. ‘아들과 함께한 특별한 여행’이라는 여행기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어도 그의 절망은 깊어만 갔다. 세상은 자신의 꿈과는 반대로 가고 어느 한 군데 오라는 대학도 없는 와중에 몸은 망가져 갔다. 벼랑 끝에 매달려 간신히 지탱하던 손목에 힘이 빠졌다.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제 스스로 매달렸던 손목의 힘을 빼기로 하였다. 나에게 이메일로 심금을 울리는 몇 편의 자작시와 처연한 러시아 음악을 보내왔다. 걱정이 되어 안부전화로 그의 상황을 주시하였다. 어느 날 느닷없이 답신이 왔다. “형님, 세상과 인연을 놓고자 절벽에서 손을 놓아 떨어져 깨어났더니 고교시절 체육시간에 떨어졌던 철봉 밑이더군요.” 강의 중 이 이야기를 나의 제자에게 전해주다 눈물을 감추려 잠시 강의실 밖으로 몸을 비꼈던 기억이 난다. ‘청년실신’ 너무 걱정마라. 살면 살아지는거야. 나의 후배가 그렇듯이 말이야. 이번 달 언젠가 수술하는 그의 완쾌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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