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가

사회적인 여러 모임이나 행사를 치르는데, 우리나라에서 근 20여년사이 바뀐 풍습이 하나 있다. 그건 ‘사정에 따라 순연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초청장이나 행사 안내문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떻게 그런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일까. 그건 가장 간단한 야외 결혼식의 경우를 보더라도 비가 안 오면 야외 결혼식장에서 멋지게 꽃 장식을 두르고 행사를 치르지만 만일 비가 온다면 작으나마 실내 공간이 준비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만치 우리의 시설이 많아지고 교통이나 주변 환경이 나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많은 야외 공연이나 행사에서는 간이 비옷을 마련하여 나누어 주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비를 맞으며 같이 발을 구르는 것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거기에 많은 행사들이 줄이어 있고 모두 바쁜 시대여서 다른 날로 연기하려 해도 공연장이 잡히지도 않고 출연자며 참석자들이 다른 날에 다시 올 수도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본 일인데 1년간의 축구 스케줄이 다 잡혀 있고 회원 중심제로 운영한다. 회원들은 새 연도가 시작되는 8월 이전에 몇 백 만원의 회비를 내고 필요시 신청해 관람한다. 우승 팀이 가려지는 5월이 가까워지면 회원이 아닌 사람은 표를 살 수도 없다.

우리나라 신문에서 TV프로그램 표를 보노라면 아직 ‘* 이 프로그램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축구경기의 경우 프로그램란에 우천시 순연이라는 문구가 기재됨)’라고 아래쪽에 적혀 있다. 아마도 프로그램이 달라져도 신문사 탓은 하지 말라는 안내일 수 있으나 원칙적으로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떡하느냐. 풍수해나 지진 등의 긴급재난 방송은 법에 따라 긴급방송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법에 따라 당연히 할 수 있는 방송을 위해 그런 문구를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외국 선진지상파 대중 방송은 일주일 전에 그리고 위성이나 케이블 등의 방송은 한 달 전에 프로그램계획표가 나오고 그대로 방송을 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우리나라 방송사가 아직도 형편에 따라 방송프로그램을 바꾸겠다는 의식은 버려야 한다. 신문에서 이런 문구가 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방송이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적이 되고 시청률이나 스폰서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성 있는 방송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지역 사회에서 지역의 건설공사며 문화행사가 중도에 바뀌거나 중단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이것은 사전에 준비가 부족했거나 설계가 잘 못 됐거나 주민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때로는 공사를 수주하고는 중도에 계속 설계를 바꾸어 가면서 싼 입찰로 보게 되는 손해를 메우려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행사든 행정이든 중도에 바꾼다는 일은 그 속내에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인쇄 된 종이는 백지보다 싸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건설된 토지는 나대지보다 싸고 나대지는 변형된 토지보다 비싸다’는 말이 성립한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시도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생활 태도이지만 사회나 국가적으로는 확신 없는 어중간한 행사나 정책은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심사숙고해야 하고 결정 이후에는 중도 변경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가? 개인 간의 약속은 몰라도 사회적인 약속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김광옥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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