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영합주의

지난 1891년 미국 상원의원 윌리엄 브라이언은 기존의 미국 양대 정당(민주당, 공화당)에 맞서서, 농민과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포퓰리스트 당(populist party)을 결성했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 일어난 브나로드(vnarod)운동, 즉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대중화운동을 정치활동에 처음 도입한 것으로, 그가 곧 포퓰리즘의 창시자다. 브라이언은 실패했지만 독일의 히틀러(나치즘), 아르헨티나의 페론(페론이즘)은 이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대중영합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포퓰리즘은 경쟁사회가 지향하는 소수지배주의 즉, 엘리트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기성질서에 대한 개혁이 근본요소다. 다시 말해 도시빈민, 영세농민, 소외계층 등 경제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대중의 호감을 얻기 위해 이들이 적대감을 갖는 ‘가진 자’, 즉 정치, 경제적 지배층의 전면해체를 주 정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다. 페론이즘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회정의, 경제적 독립, 정치적 주권을 슬로건으로 한 페론은 소득재분배, 수입대체공업화, 기간산업국유화, 소외계층 조직화 등에 엄청난 국가재정을 쏟아 넣다가 집권당시 세계 9위(1946)의 경제대국을 말기에는 16위(1956)로 떨어뜨렸다.

최근의 예가 또 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다. 지난 1980년 집권해서 지금까지 통치하고 있는 무가베 대통령은 백인이 가지고 있던 땅을 몰수해서 국민들에게 주고 외국인이 가진 기업주식 50%를 강제 헌납시키고, 물건은 반드시 싼값에 팔아야 한다는 법률을 만드는 등 영합정책을 쓰다가 지금 경제파탄의 위기에 몰려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이 최근 중남미국가들을 중심으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브라질(룰라), 베네주엘라(차베스), 우루과이(바스케스), 칠레(바첼렛), 볼리비아(모릴레스), 아르헨티나(키르치네르) 등이 그렇고, 우리나라의 과거 10년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촛불집회가 전국을 달구고 있을 때, 이를 가리켜 ‘디지털 포퓰리즘의 힘’이라고 했다. 정보화가 진척될수록 대중의 힘은 그만큼 강해진다. 디지털의 특성은 한마디로 ‘대량’과 ‘신속’이다. 종전의 아날로그 시대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됐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서민정책을 두고, 포퓰리즘(populism) 논란이 한창이다. 선거를 의식해서 급하게 꾸며진 대중영합행위라는 것이 야당 등 서민정책을 비판하는 쪽의 주장이고, 경제위기와 대량실업으로 고통 받는 서민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 이를 옹호하는 주장이다. 시대의 변화가 급격해진 요즘 같은 시점에서 어디까지가 서민정책이고 어디부터가 포퓰리즘인지를 판단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준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정책이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감성적인 호소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경우 전자는 정상적 정책행위일 것이고, 후자는 포퓰리즘이기가 쉽다. 두 번째는 정부의 지원이 노동 등 대가를 전제로 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이다. 즉 유상(有償)인가, 무상인가인데, 여기서도 후자를 포퓰리즘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그동안 서민정책으로 생계형 범죄사면, 취업 후 학자금 상환, 희망근로 사업, 노점상 등 서민 무보증 소액대출, 맞벌이 부부 보육비 절감, 교통법규위반 과태료 감면 등을 내 놓았다. 대중영합적 측면(학자금, 무보증 대출 등)이 없진 않지만 사회 안정적 측면이 더 크다. 과거 정부에서 시행했거나 시도했던 학력타파, 대학서열철폐, 전국 차량번호통일 등에 비교할 때, 보다 현실적이고 정도 역시 매우 약하다.

어찌됐던 포퓰리즘은 선거에는 유리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유혹이 크겠지만, 분명히 경계가 필요하고 신중해야 한다. 자칫 하다간 배를 산으로 끌고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장호 경영학 박사·전 한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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