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재일교포 2세 역사학자였다.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쓰거나, 가끔 붓을 들어 글씨를 쓰거나,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고요해 보였다. 이에 반해 나는 사회적인 승부욕과 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 움직여 세상과 부딪치고 사람들과 경쟁하여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나는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나는 조금은 교만해졌다. 누구와 겨루어도 이길 수 있었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0여 년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아버지가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더 많이 가진 자는 그만큼 더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삶의 목표가 소유에 그치고 말면 천박해지는 법이니,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은 다시 세상에 되돌려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무심결에 “예”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이후로 우리 부녀 사이에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산들바람처럼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씀은, 내 귀에 들어온 뒤부터는 폭풍이 되어 내 몸을 휘감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극으로 치달리는 딸의 교만을 감지하고 방향을 일러주셨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나는 되돌려주는 방법을 고민했고, 몇 년 뒤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국으로 돌아왔다. 제주도에 정박아들을 모아 보살피는 ‘혜정원’(아가의 집)을 세웠고, 평생 모은 고지도들을 경희대학교에 기부하여 ‘혜정박물관’을 열었다. 돌이켜 보면 이 조촐한 일들은 모두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을 실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 反者, 道之動’이라고 했다. 자연에서 온 우리 삶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듯, 이 세상에서 얻은 재물과 사랑과 지식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주는 것이 이치이자 법도이다. 힘들게 올라간 백척간두 위에서 한발을 내딛고, 깨달음을 얻은 뒤 끊어버린 속세 길을 다시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어렵고 보람 있는 일이다. 근래 책상 뒤에 표구하여 걸어놓은 아버지의 필적 ‘動者利進爲, 靜者樂止居’(움직이는 자는 진취적으로 성취하는 데 이롭고, 고요한 자는 그쳐 머무는 것을 즐긴다)에서 가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아버지의 조용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던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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