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말 연(燕)나라 소왕(召王)은 현사 곽외를 불러 천하의 인재를 모을 방도를 물었다. 곽외는 옛날 어느 왕이 1년 안에 세 마리의 천리마를 얻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왕은 어렵게 구한 죽은 천리마의 뼈를 오백금에 샀는데, 그 소문이 퍼지자 천리마를 가지고 있었으나 제 값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곽외는 자신을 죽은 천리마의 뼈로 삼아 먼저 등용할 것을 건의했다. 소왕이 곽외를 등용하여 예우하자 과연 천하의 인재들이 찾아왔고, 소왕은 이들의 힘으로 국력을 진흥시킬 수 있었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은 누만금의 거부였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수많은 조선의 문화재들이 마구잡이로 일본에 반출되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귀국한 그는 값의 고하와 거리의 원근을 묻지 않고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시세의 2~3배를 주고 구입했으며, 당시 서울의 기와집 여러 채 값을 지불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중에 들어온 것은 내파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문화재는 경제가치가 아니라 절대미이자 지고선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은 물건이 나오면 으레 그에게로 가져왔고, 전형필은 수많은 조선의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다.
제왕과 수집가가 각각 인재와 문화재를 모으는 방법 사이에는 상통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경제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이전에 꼭 필요한 것은 문화재를 알아보는 안목이다. 조선후기 유한준(1732~1811)은 한 미술품 수집가에게 준 글에서, 서화를 대하는 안목을 ‘아는 단계(知)’·‘사랑하는 단계(愛)’·‘볼 줄 아는 단계(看)’·‘모으는 단계(畜)’ 네 층위로 나누어 설명했다. 가장 높은 경지는 ‘아는 단계’이다. 여기서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며, 보이면 모으게 되는 것이니, 무턱대고 그저 모으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수집가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공익에 대한 신념이다. 옛날 어떤 분은 “학문은 자기에게서 이루어지나, 그 이익은 세상 사람들에게 미친다(學成於己, 利及於人)”라고 했는데, ‘학문’의 자리에 ‘수집’을 넣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배를 불리는 수집은 탐욕일 뿐이다. 안목과 격조를 갖춘 수집가들이 많은 나라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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