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세월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지도 유물을 수집하고, 이 유물들을 가지고 고지도 전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 영혼을 사로잡은 것 중 하나가 고지도에 표기된 ‘동해’라는 명칭이었다.
18세기까지 전 세계에서 제작된 지도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를 동해로 표기했다. 19세기 이후 지도에서 이 바다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는데, 이는 국력이 부쩍 커진 일본이 세계 여러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각종 고지도에 그려진 동해를 보면서 역사와 이름의 관계를 생각하곤 한다.
지도를 보다가 문득 동해의 역사와 삶을 떠올렸다. 이 바다에는 무슨 사연과 내력이 감추어져 있으며, 여기를 배경으로 펼쳐진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옛 문헌을 들추고 연구 성과를 뒤지는 한편 틈틈이 동해 곳곳을 찾아갔다. 포구의 새벽시장에서 어촌민들의 생동감 넘치는 삶을 느끼고, 옛사람들이 울릉도를 보았다는 삼척의 소공대(召公臺)에 올라보고, 각종 민속의 흔적을 돌아보았다. 천지개벽 이래 동해는 백두대간의 앞마당이었고, 옛 사람들은 둘을 하나의 짝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80년 정철은 삼척 죽서루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설핏 잠이 들어 꿈속에서 신선에게, 국자 모양 북두칠성을 기울여 창해수를 부어 마시고, 또 이 술을 세상에 고루 나누어 억만창생을 다 취(醉)하게 한 뒤 다시 만나 한 잔 할 것을 제안한다(관동별곡). 비슷한 시기 임숙영은 금강산 비로봉 위에 올라 “동해를 기울여서 봄 술 잔에 더한 뒤에, 이 세상 억만 사람 모두 취케 하고져!”라고 읊조렸다. 이는 백두대간 위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지식인의 기상이자 목민관의 포부가 이러했다. 옛글에 “산에 오르니 정이 산에 가득하고, 바다를 보니 뜻이 바다에 넘친다”고 했으니, 백두대간과 동해에 딱 어울리는 구절이다.
몇 번 동해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지도를 보니, 그 위에 백두대간이 꿈틀대고 연구실 안에 동해 파도가 넘실거린다. 알고 사랑하니 관념과 현실이 일여(一如)하게 된 것이라. 세상 모든 존재는 더 많이 알고 더 뜨겁게 사랑하는 자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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