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위의 내 발자국

김태균 분당서울대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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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내 수술팀 막내는 이제 의사로서 첫걸음을 시작하는 26세된 여자 수련의다. 며칠 전 그 수련의에게 장래 희망하는 전공분야에 대해 물었다. “이제 막 병원 근무를 시작했으니 수련의로서 1년을 지낸 후 결정하겠습니다”라는 취지의 대답을 기대한 나에게 그는 놀라운 대답을 건넸다.

“암을 전공하는 내과전문의가 되고 싶습니다” 한 때는 사람의 뇌를 다루는 신경외과 의사가 될 것을 희망했지만 뇌수술에 동반되는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과 뇌수술 환자에서 종종 남게 되는 신체 장애 등이 부담스러워서 신경외과 의사로서의 꿈을 접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다른 의사들이 도움을 줄 수 없는 말기 암 환자들에게도 포기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모습이 좋아서요. 모교에서 학생실습 때 그런 은사님을 몇 분 뵈었습니다” 암전문의를 희망하는 이유를 묻는 내 질문에 그가 답한 내용이었다.

근래의 의료계에서 나타나는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소중한 생명을 보살피는 분야보다는 전문의를 마치고 나서 여유롭고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할 때, 그 수련의의 답변은 내게 신선한 감동이었다.

그날 이후 후배 의사들에게 비춰질 내 모습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회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나는 수술, 강의 및 논문 준비로 여유 없는 주말, 쾌적함과는 거리가 먼 내 일상에 혹시 정형외과를 지망하는 후배들이 발걸음을 돌리지나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어떤 영화도, 그 어떤 스포츠도, 그 어떤 휴양지도 아닌 새벽을 깨고 나와 시작하는 아침 회진과 주말 내내 끙끙거리며 마무리한 논문, 늦은 밤 회진에서 만난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환자의 어진 눈 빛이 내 삶을 밝고 시원한 곳으로 이끌고 있음을 그들이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소중한 것을 이루기 위한 땀과 배울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이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경계임을 나는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른 새벽, 아무도 밟지 않는 흰 눈 가득한 벌판을 바라보는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대 발자국을 따라 걷는 뒷사람이 잘 못된 길로 가지는 않을까를 마땅히 걱정할 일이다” 서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즘 내 마음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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