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성근제 인하대 연구교수·중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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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를 연 하(夏)나라의 첫 번째 제왕 우(禹) 임금은 물길을 다스려낸 치수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가 오랫동안 중국과 유가 문명을 상징하는 한 축으로 떠받들어진 이유는 ‘치수’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의 치수 ‘방법’에 있다. 그의 아버지 ‘곤(?)’은 하느님의 신기한 보물인 식양(息壤:저절로 불어나 산을 이루고 벽을 세우는 흙이다)을 훔쳐와 둑을 쌓고 물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물길을 막는 그의 치수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 더 큰 물난리를 불러왔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다. 땅을 살피고 물을 살펴, 물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뚫어주었다. 이 물이 바로 황하다. 우의 방법이 바른 정치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진 뜻은 결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며칠 전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여배우의 안타까운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엉뚱하게도 여의도를 달구고 있는 모양이다. 정부 여당은 그 동안 소원하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기다렸다는 듯이 고인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일명 ‘최진실법’이란다. 고인이 쌓아 올린 명성과 인기를 ‘식양’으로 삼으려 하는 모양이다. 날렵하게 식양을 훔쳐 내는 데에 성공한 이상 아마도 그들의 시도는 성공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보다 더 당혹스럽고 가슴이 아팠던 것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영화감독’이라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지난 2일 ‘영화감독 네트워크’ 명의로 발표된 성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한민국 영화감독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지만, “이은주에 이어 최진실마저 보내게 된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진정한 언론의 자유이자 표현의 자유인가 되묻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권력”이 “거의 일방적으로 (익명의) 네티즌의 파워에 쏠려 있는 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다고 엄살을 부리더니, 기어코 “이번 사태가… 인터넷 공간이 정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은근한 엄포를 기대인 양 늘어놓는다.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은주를 들먹이다니. 적어도 고인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감독’들이라면, 적어도 이 시대를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지 싶다. ‘익명의 네티즌’이라는 정치화된 유행어 뒤에 숨어서 이 여배우들의 죽음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먼저 간 이 배우들과 살아 있는 이 나라의 모든 배우들이 감당해야 할, 그리고 감당했어야 할 하중이 그 놈의 ‘악플’들 뿐이라고 여론을 몰아가는 저 낯 두꺼운 정치인들과 기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인가? 여배우들의 몸뚱이와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벗기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제작사와 일부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감히 책임을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인가? 지금 진정으로 ‘익명’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여배우의 죽음을 이용하고, 대중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앗아가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당신들 감독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성명 속의 질문 그대로 “우리가 그토록 지키려고 싸워온 ‘표현의 자유’”에 이 시대 대중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사회적 매체인 ‘댓글’이 포함이 되지 않는다면, 과연 당신들이 이야기하려는 표현의 자유란 어떤 것인가? 역시 “정화”된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속으로 뒤돌아 들어가라. 거기에 그 ‘정화된 사회’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 않은가.

성근제 인하대 연구교수·중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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