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축조시작 3년 전인 1791년 진산에 살던 천주교도인 윤지충·권상연이 형식에 치우친 조상제사를 미신이라며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도처의 서학 반대자들과 유생들로부터 “천주교도들은 조상과 부모도 몰라 보는 사학무리”란 비난들이 쏟아졌다. 정조 주위에 사악한 무리들(정약용 선생 등 서학자들)을 물리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하지만 정조대왕은 사건을 일으킨 두 사람만 극형에 처했을뿐 이듬해 다산 선생에게 화성설계를 하명했고 다산 선생은 왕명을 받들어 2년 동안 설계구상을 마쳤고 1794년 1월부터 수원화성이 축조된다. 다산 선생은 진산사건이 사람들 뇌리에서 채 잊혀지기도 전에 대담하게도 서학 십자가를 수원화성에 표현한다.
박천우 장안대 국사학과 교수에 의하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꽃을 쫒고 버드나무를 따라 지어진 정자) 십자가와 도심의 십자가형 도로 등은 천주교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서쪽편에 정자를 확대, 만들어진 ‘자’형의 변형정자인데 당시 정서상 당연히 해뜨는 동쪽편에 정자를 확장해야 하는데도 반대로 해지는 서쪽에 정자를 확장한 형태이다. 서쪽 벽면에 십자가 86개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건축문양은 ‘아(亞)’자형이나 십장생이었고 십자형 문양은 방화수류정에만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서쪽에서 온다는 의미로 서쪽벽에 십자가를 새겨넣고 서쪽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지붕이 십자가형이고 천정과 바닥이 역시 십자가형이다. 특히 석양 무렵 서벽의 십자가들이 선명한 빛을 내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어둠을 물리치는 광명이란 메시지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서학의 십자가와 유·불교 전통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형태이다. 이는 다산 선생이 공맹과 전통사상 위에 천주신앙을 접목시켜 동·서양의 조화와 토착화를 이루려 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성행궁 앞의 도로인 종로사거리도 당시 일반적이던 도심의 ‘정(丁)’자형이 아닌 십자가형으로 설계됐다.
다산 선생은 유배 이후 고향 남양주에서 지내며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836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형 음각도장이 발견됐고 그의 묘지에서도 십자가가 발견됐다.
나경환 북수동성당 주임신부 뽈리화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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