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겁다. 행복하다. 자랑스럽다. 때가 되면 풍요로운 공기가 찾아오는 이 땅이 자랑스럽고 그 땅 위에서 계절을 맞을 수 있음이 행복하고, 그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잔치가 있어 즐겁다. 30~40년 전만 해도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나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로 따오기가 울던 습지에서, 이젠 책 읽는 향기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는 단지로 바뀐 이곳이 자랑스럽다. 이제 이 땅에서 오뉴월이면 꽃들의 잔치가 열릴 것이다.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하며 즐거운 노을을 노래했던 선현들이 있는 이 땅. ‘율곡(栗谷)’이나 ‘우계(牛溪)’ 등의 마을을 또 하나의 제 이름으로 자랑스럽게 썼던 선현들. 그들의 해타(咳唾)를 기꺼이 두 손에 받으며 일하는 이들이 있어 자랑스럽다.
어둠이 구렁이처럼 슬슬 마실 나오는 저녁 다람쥐와 너구리, 소쩍새 등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청 지붕 밑. 늦게까지 환하게 불 밝히고 일하는 손길이 있어, 탄내 나도록 움직이는 신발이 있어, 나의 등은 따스하다. 그들에게 공짜 점심은 없다며 독려하고 있는 현장(賢將)이 있기에 나의 배도 든든할 것이다. 며칠 전 이곳에서의 ‘초스피드’가 모든 지상과 인구에 회자됐다. 스피드는 변화를 앞당기는 끈, 탄성을 부르는 달콤한 시간이다.
다만, 이 행복들이 너무나 빨리 다가오고 지나치기에 그 행복들을 제대로 다 음미하지 못할까 저어될 지경이다. 아주 오래 전, 우리 아파트단지가 동산이었을 때였다. 커다란 노송에서 구렁이 한마리가 천천히 탈피하고 있었다. 그 껍질은 오랫 동안 노송에 걸린 채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 머릿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탈피도, 변화도 좋고 빠름도 좋지만, 구렁이 껍질 같은 그런 흔적을 오랫 동안 간직할 수 있는 일도 필요하다. 이처럼 즐거운 나의 고장, 즐거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깨끗한 도시 만들기가 시행되자 오랫 동안 간판업을 해오던 동네 선배가 즉시 재활용업으로 전환했다. 어느 할머니가 모 대학에 아주 커다란 액수의 장학금을 기부했다. 그리고는 한사코 무명으로 돌아섰다. 그 아름다운 노인이 사는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그 무명 할머니에게 나는 이름을 붙여 드렸다. 줄행랑 할머니.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고 줄행랑치듯 했던 할머니. 즐겁게 행복하게 자랑스러운 할머니. 이제, 보스턴에서 뛰던 제2의 서윤복·함기용 선수들이 공복(公僕)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고 행복한 할머니가 있고 자랑스러운 시민이 있는 제1번 국도를 달리게 되고 보일듯 보이지 않게 숨어 처량하게 울지 않는 따오기와 뜸부기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박 훈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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