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火病)에 대하여

성보기 수원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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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성이 풍부하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책에서부터 한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인정하고 있거니와, 오늘날 우리 문화가 한류라는 용어로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도,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기대를 넘어서는 성과를 올린 것도 그 풍부한 감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한편, 이러한 감성을 다스리지 못해 나타난 병리현상이 있으니, 한국인의 대표적인 정서로 표현되곤 하는 한(恨)이다. 한이란 원하는 바나 억울함이 풀리지 못하고 응어리져 마음에 맺힌 상태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한을 품다 병에 이른 것이 화병(火病)이다. 화병은 국제의학계에서도 ‘Hwabyung’이라는 정식용어로 규정되면서 한국적 정신신경장애 증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화병에 걸린 것 같은 당사자를 더러 만나게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법정에서 흥분해 고함을 지르고, 재판 진행을 위한 대화 자체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법정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하면서 이익을 최대한 실현시켜야 할 곳이 아닌가. 재판을 이기게 해 주는 것은 빈틈 없는 주장과 이를 입증할 증거이지 큰 목소리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이해해야 할 것은, 이렇게 법정에서 흥분하는 분들 중 많은 경우는 자신의 감정을 너무 오래 참아와 폭발해 버린 분들이다. 진작 표현했더라면, 아니면 법원이라도 조금 더 일찍 찾았더라면 소송의 승패 여부를 떠나 그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하지만 감정의 폭발은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하는데다 또다른 피해자를 만든다는 점에서 좋을 게 없다. 감정은 그때그때 표현하는 게 좋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때부터 밉지 않고 과하지도 않게 소박한 감정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아울러 상대방의 솔직한 표현을 너그러이 받아줘야 함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이 사회에 의사소통이 활발해지면 화병도 많이 없어질 것 같다.

법률가이니까 한마디, 법원은 한을 풀 수 있는 곳이다. 법정에서 모든 한을 풀어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법으로 해결하는 영역은 현재보다 더 늘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재판을 꺼리다보면 다툼은 흔히 힘 있는 자나 목소리 큰 자의 뜻에 따라 해결되고, 그 결과가 한맺힘 또는 화병이다. 이 점에서 국제적으로 알려진 병인 화병을 없앨 짐은 신경정신과 의사들보다 판사들에게 더 지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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