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천주교 순교역사와 북수동성당(수원성지)1

나경환 북수동성당 주임신부 뽈리화랑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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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천주교회 역사는 박해시대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피를 흘린 순교의 역사이며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여곡절 끝에 1776년 조선왕조 제20대 왕에 즉위(1776년)한 정조대왕(실명:이산 1752~1800년)은 11살 어린 시절 당쟁의 회오리 속에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통한을 뿌리며 비참하게 죽어간 부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부친 사망 이후 동궁의 몸으로 14년 동안 수십차례 자객들의 습격을 받는 등 숱한 생명의 위협을 겪어야 했던 정조대왕은 왕권을 확립하며 새로운 개혁정치를 결행해 나가게 된다. 1789년 서울 동대문 밖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로 널리 알려진 수원의 화산(花山:옛 수원읍치 온갖 꽃이 피는 산 현 융릉 일대)으로 이장한다. 묘이장 때 개혁파인 남인계 다산 정약용의 지혜로 한강에 놓여진 부교를 통해 이장행렬이 안전하게 건너게 됨으로써 정약용은 정조대왕의 신임을 얻고 후에 수원화성 설계가 그에게 맡겨진다. 부친의 묘를 현융원에 모신 정조대왕은 해마다 부친께 효성의 예를 드리기 위해 한양에서부터 능행길에 오른다.

당시 현재의 수원 도심은 존재하지 않았을 때였다.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역이 새롭게 드러선 융릉 일대 구 수원 읍치에 살던 주민 677명(가구수 244호)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내주고 이주민들이 새로운 읍치에서 빨리 삶의 터전을 잡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수원을 자신의 정치적 개혁을 실현할 제2의 한양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역사상 첫 신도시계획을 진행한다. 정조대왕은 남인파의 수장이었던 채재공 재상을 비롯, 정약용, 이가환 등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던 개혁성향의 천주교 학자들을 대거 등용하며 수원화성에 관아와 향교,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시설들을 마련하고 농업진흥 생산기반시설로 만석거(일왕저수지), 만년제, 축만제 등 인공호수들을 조성하는 한편, 세제혜택과 과거를 통한 인재등용의 기회를 주는 등 다각적인 민생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수원을 현재의 직할시격인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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