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도에서 벌어진 지자체 단체장 선거와 관련된 사건들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주민 5천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 위기에 처해 있고, 벌써 몇명이 자살을 했다. 뽑는 단체장들마다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 탈락하고 해마다 선거를 하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산과 물과 인간 심성이 모두 맑아 삼청(三淸)이라고 불린다던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하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 맑은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사람 좋다”고 말하는 경우는 대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도덕성 등과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술 먹고 말썽 피우는 짓을 자주 하는 사람, 그래서 결코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사람도, 주변인들로부터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라는 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사람이 좋아 술도 잘 마시고 말썽도 피우게 된다는 생각조차 강하다. 그에 비해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사는 사람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도덕성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심성’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연적 가치에 관련되어 있는 도덕과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나아가 이성과 계약 관계로 움직여지는 근대 이후 사회의 ‘시민의식’이란 것과 ‘착한 심성’의 거리는 더더욱 멀 수 있다. 올바른 시민의식을 그저 모든 인간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인간관계를 떠나 좀 더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지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근거는 내 주변의 있는 사람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아니라, 더 넓은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고려한 공공의 이익이나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 같은 거시적인 시야를 요구한다. 아무리 주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해도 이런 가치에 배치된다 싶으면 매몰차게 거절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의식이 바로 시민의식이다.
원만한 인간관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은 참으로 강하다. 아마 우리는 오랫 동안 소공동체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공동체에서는 주변 사람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만 생각해도 된다. 그것이 도덕성이나 국가 발전과 배치되는 결정적 순간이 되면 대개 좀 더 냉철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소공동체의 지식인 좌장이 판단을 내리고, 공동체 성원들은 그 좌장을 어른으로 모시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근대사회는 이러한 소공동체보다 훨씬 큰 단위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사회이다. 각 개인과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인간적 관계로 맺어진 소공동체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근대사회에서 이들은 이익집단이 된다. 그들 사이에서 ‘사람 좋다’는 것이 사회 전체의 발전과는 완전히 배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청도처럼 덜 도시화된 지역은, 게다가 부근의 대도시조차 오랫 동안 연고주의로 움직여왔던 관행을 떨쳐버리지 못한 지역이니 인간은 참 따뜻하고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선거는 늘 연줄이나 관계로 움직이고, 돈은 다시 연줄과 관계를 만들고 강화시킨다. 그야말로 부패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요즘 애들 말처럼 ‘까칠’하게 원칙을 따지고,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그래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싸가지’가 없거나 ‘너무 맑아 고기가 놀 수 없는 물’ 등으로 치부되는 사람이 오히려 근대적 시민의식에 가까운 인물일 수 있다. “사람 좋은 게 다”라고 이야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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