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일로 두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킨 또순이, 막노동 일을 하는 남편과 둘이서 팔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을순 언니. 대학생이 된 아들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던 한을 남기고 코리안 드림을 접은 중국 동포 임씨 일가. 새해 새 아침 화재로 열심히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보면서 오늘 다시 신을 생각한다.
왜 하필 신인가? 먼저 중세의 신 앞에 맞섰던 빛나는 근대 이성의 과학이 이 사태를 설명하는 데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는 예술적 감성으로도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설명해서는 안 되는 전지전능한 종교의 힘에서 구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지막 구원처, 신은 왜 이들을 외면했는가? 아니 신은 진정 구원자인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기실 중세의 관념적 신, 토마스 아퀴나스, 성리학, 선불교가 제시한 하나님, 천, 태극, 부처 등 절대적, 극상대적 존재와 맞섰던 근대 이성은 그 다른 극의 물질적 신, 물신인 상품, 화폐를 낳았다. 신은 죽지 않았다. 관념신이 비정한 물질신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물신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야말로 근대 종교와 다름없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그것에 맛들이고 마침내 무기력한 신도로 만들어왔다. 가난한 이웃들의 죽음이 어찌 한갓 우연한 사고이겠는가! 과학도 예술도 아닌 종교만이 유일하게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하여 오늘 다시 신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 신은 저렇게 그 죽음의 원인은 해명했지만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그 생명 샘을 과학이나 예술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종교, 신은 있는가? 있다. 그것은 신의 고향인 인간에게로 신을 귀환시키는 것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그가 만든 신으로부터 거꾸로 소외당하고 있지만, 그 신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신은 ‘신도 아니면서, 신이 아닌 것도 아닌’, 인간이면서 초인인, 비-신(非神)이다. 이것이 열린 종교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 위에 선 종교라면 나는 이를 ‘절로’교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의 첫 번째 의미는 ‘저절로’, 자연적으로 이다. 두 번째 의미는 ‘저로부터’, 주체적으로 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의미는 ‘절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섬김으로 이다. 나로부터 비롯하여 너를 섬기고 마침내 자연과 어우러지는 ‘절로’, 생명의 종교이다.
이러한 원리를 실현시키는 두 상징을 바다와 숲이라 상상해 본다. 바다는 ‘받아들이는’ 관용, ‘바닥’에 침잠하는 명상, ‘바람’을 싣는 기도이며, ‘바탕’이며, ‘바로 보는’ 곳이다. 숲은 개개의 나무가 자기의 다양한 개성을 가지면서 모두가 아울러 하나를 이루는 보편성이 실현되는 곳이다.
이렇게 바다에 이르러 숲을 그리며 신을 바라는 인간 곁으로 다가와 그들과 더불어 같이 하는 것, 이것만이 억울한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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