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이 있다. 19세기 말, 조선이 서양의 발달한 과학문물을 받아들일 때의 입장을 정리한 말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을 그대로 살리면서(東道), 서양의 발달한 군사·과학 기술을 수용하자(西器)는 것으로 강대국의 개방 압력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당시 사람들의 고뇌가 담겨 있다. 당시 교육에 있어 동도서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정신, 예컨대 스승 존경이나 배움의 진지함 등을 살리면서 그 외적인 면, 즉 교육시설이나 체계 등을 받아들여 우리의 교육수준을 한 단계 올리려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광복 이후 우리는 외국의 교육사조와 교수 방법론 등을 받아들여 실험해 보기에 급급했다. 지금까지 여덟차례나 교육과정을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육 빈국이 됐다.
가까운 1960년대나 1970년대만 해도 전통적인 교육정신이 살아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교육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학생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학급당 60~70명, 심지어는 1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수용하기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 등을 편성해야 했다. 한 교사가 담당해야 하는 학생 수가 많았으므로 자연히 교사 중심의 암기·주입식 교육에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당시 교육받은 사람들은 그때의 교육이 부실했다거나 요즘 한창 부르짖는 창의성 계발을 도외시한 교육이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과연 암기교육, 주입식교육 등이 전혀 불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암기교육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조선시대만 해도 천자문, 소학, 논어, 맹자, 한시 선집 등을 외우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무모하기 짝이 없는 교육을 4~5년 동안 받은 학생들은 어느날 갑자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어려운 한문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까다롭기 짝이 없다는 한시까지도 읊조릴 수 있었다.
앞으로 외국것들만 무조건 따르지 말고 우리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는 교육이론과 방법 등이 모색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세계의 유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교육강국이 됐으면 좋겠다. 과거 우리 교육은 퇴계·율곡·남명·다산·연암 선생들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을 배출한 전통이 있다.
변우복 김포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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