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는 서로 다른데 땅 위로 자라는 몸은 둘이 붙어 있어 한 몸을 이루는 나무가 있다. 같이 꼭 붙어 껴안고 살지만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고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무를 ‘연리지’라고 한다. 연리지 나무는 한 나무가 죽으면 옆에 붙어 있는 나무는 죽는다고 한다. ‘나’라는 말 안에는 ‘너’라는 의미가 함축되고 전제된, 살아 있는 말이다. 진정 ‘너’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나’라는 자리는 불완전함을 안고 사는 존재이기에, 그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너’라는 자리에 우리는 물질적인 것등을 포함한 왜곡된 것들로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중독돼 간다.
지난해 4월 미국에서 일어난 버지니아 총격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나’가 아닌 ‘너’인 조승희가 일으켰고, 이로 인해 ‘나’인 많은 희생자들을 포함한 우리들이 충격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 등을 감당했던 사건이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너’와 ‘너의 가족’의 행복이 전제됐어야 함을 새삼 절실히 느꼈던 사건이다. ‘너’라는 자리에 ‘나’만의 이익을 위한 소유의 대상, 이용의 대상만을 두고 산다면 그 ‘나’라는 대상에겐 어떤 희생도 은총도 만남도 현재도 사랑도 평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이다.
‘너’라는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치가 부여된 사람을, 경외롭기 그지없는 자연을, 우리네 인간의 교만을 깨닫게 해주는 신의 존재를 두고 관계함이 ‘나’의 본래 자리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임을 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은 ‘나’ 자신을 삶 속에서 지탱시키고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그 나름대로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이면의 마음인 이타심, 희생, 사랑의 마음 등을 ‘나’와 ‘너’가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라는 울타리에 품고 산다면 균형되고 조화로운 ‘나’와 ‘너’가 자리할 것이다. 미래사회로 갈수록 개인주의화되는 과정 속에서, ‘나’와 ‘너’의 관계가 계속 상처받고 왜곡돼 사회가 조각조각 나눠지는 불행한 사태에 이르지 않기 위해, 먼저 ‘나’부터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의 운율로 ‘너’를 불러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김유신 김유신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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