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로 ‘문화’를 처음 쓴 이는 당나라의 두광정(杜光庭)이다. 국가 발전을 두고 ‘修文化而服遐荒(문화를 닦고 물질을 풍부하게 하다)’라고 논한 그의 문장에 문화가 나오며, 중국 고전에서 이 문화는 문물교화(文物敎化)를 뜻했다. 또한 문화의 영문 단어인 ‘culture’는 라틴어 cultura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본래 뜻은 동식물의 경작이나 재배였다. 이는 동식물을 따라다니며 잡고 빼앗던, 즉 힘과 폭력이 지배하던 그 옛날 수렵 채취 시대에는 문화가 없었고, 일정한 곳에서 오래 머물며 동식물을 기르고 서로 돕는, 즉 경험과 지혜가 지배하는 농경 정착 시대에 문화가 등장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 판에서는 평범한 다수가 탁월한 소수보다 더 지혜롭다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믿고 있는 웹2.0의 시대정신이 그다지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이번 대선은 문화의 지고한 가치인 도덕과 양심이 ‘집단’으로 뒤죽박죽되어 경험과 지혜가 무용하기 짝이 없는 참으로 비문화적인 정글 판이 아닌가. 더욱이 눈에 버쩍 뜨이는 문화정책 부문 공약마저 없어 우울하다.
최근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76%인 190개가 비전이나 주요 추진 전략으로 문화를 내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행복한 문화예술 도시’(춘천시), ‘긍지 높은 문화 군민’(예천군)과 같은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는 정치와 경제의 앞이나 위, 아니면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적 지위에 문화를 올려놓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바로 ‘문화의 세기’다. 이렇게 자치단체는 ‘문화의 세기’에 걸맞게 문화로써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라를 이끌 대통령 후보들의 문화 정책은 어떠할까.
요즘 대선 관련 보도에서 문화예술인들을 직접 만나 표를 달라는 후보들의 행보는 띄엄띄엄 발견되지만 정작 문화 공약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문화예술지 2007년 겨울호에는 몇몇 대통령 후보들의 문화정책에 관한 서면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는데, 답변지를 작성했을 참모진들의 말의 잔치만 무성할 뿐이다. 대선 진영의 문화 정책은 약속이나 한 듯 다들 빈곤하여 조금 심하게 말하면 ‘문화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적극 지원하겠다’는 매우 단순한 원론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60년대까지의 보릿고개 시절을 넘어설 즈음에야 근대적인 의미의 우리나라 문화 정책은 시작되는데, 72년 8월 14일 문예진흥법 제정, 73년 10월 11일 문예진흥원 개원, 73년 10월 17일 문예중흥 5개년계획 선포, 73년 10월 20일 제1회 문화의 날 행사 등 일련의 흐름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압축적인 근대화로 인한 정신의 소외를 문화로써 치유한다면서 안으로는 지식인과 예술인을 달래고 억압하여 유신 체제를 다지는 데 활용하기도 했던 문화 정책이 한 세대 뒤에는 ‘문화의 세기’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숭상되고 있다. 아직은 깃발뿐이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깃발을 휘날리며 앞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날 정글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극복하고 양극화를 치유하는 첫째는 그 사회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다음 정부는 이를 위해 ‘문화민주주의’ 정책을 강력히 전개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경제적 관점의 마구잡이식 개발을 방지하는 ‘문화영향평가제’, 문화행정의 전문성을 보장하는 ‘문화행정직렬제’의 도입도 요구된다.
그러나 이번 대선 판을 지켜보면서 불행하게도 필자는 다음 정부의 문화정책에 회의를 갖게 된다. 한 국가의 문화정책이란 결국 지순한 도덕과 양심에 따라 국민들이 마음대로 즐거울 수 있도록 잔칫상을 차려 주는 일일진대, 집단지성마저 방향을 잃은 지금의 대선 판은 우리가 오래도록 신봉한 가치들을 전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그름이 제대로 가려질 때 문화는 싹트는 법이다.
우리에게 문화대통령은 아직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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