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무 앞에서 깨닫는 인간의 허위

이영미 대중예술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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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이천의 시골 마을이다. 집의 양 옆이 모두 나지막한 야산이라 요즘 같은 때는 그저 눈만 돌려도 붉게 물든 나뭇잎을 볼 수 있다. 한편 경기도의 태반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하루가 다르게 새 집들이 세워진다. 집을 하도 속전속결 식으로 짓다 보니, 늘 다니던 길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우뚝 서 있는 새 집을 만나게 되는 때도 많다. 어제 본 통나무 무늬의 집도 그렇게 갑자기 만난 집이었다. 한달 전만 해도 이런 집을 본 기억이 없는데, 아마 몇 주일 사이에 지은 모양이다.

그 집은 ‘무늬만 나무’인 가짜 통나무집이었다. 통나무의 볼륨과 무늬, 색깔을 고스란히 본 뜬 건축자재를 쓴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터인데, 이날 따라 유달리 그 옆에서 이파리를 뚝뚝 떨구고 있는 나무들과 크게 대조가 됐다.

여름의 푸르고 무성한 이파리들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더라면 그 가짜 통나무 색깔도 그 기운에 그럭저럭 묻혀버려 그렇게까지 생경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제 나무들이 스스로 물기를 말리며 팽팽한 피부를 스스로 버리고 줄기마저 바삭한 느낌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에, 이런 계절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 가짜 나무는 아무리 나무인 척을 해도 존재만으로도 “나 짝퉁이요”하고 티를 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척’을 하면서 사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인 척하는 합성수지 장판을 깔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합성수지 냄새는 꽃향기인 척하는 인공향료를 뿜어 가려버린다. 유리인 척하는 물병으로 물을 받아 쇠고기인 척하는 조미료를 넣어 국을 끓인다. 석류인 척, 레몬인 척하는 향료와 색소를 섞은 자칭 웰빙 음료로 목을 축이며, 자연세제인 척하는 자칭 웰빙 합성세제로 빨래를 한다.

그뿐이랴. 명품인 척하는 짝퉁 옷을 입고, 키 큰 척하는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며, 젊은 척 염색을 한다. 사람을 만나서는 고상한 척, 유식한 척을 하며, 이런 ‘척’도 못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긴다. 착한 척하는 위선적 인간들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그러한 고백조차 솔직한 척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인간은 무언가 ‘척’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면서도, 아니 그것 때문에 늘 허망하다. 그래서 아무런 ‘척’을 하지 않는 자연에 가까이 가려고 무진 노력을 한다. 아무리 인간이 재주를 피워 만든 인조의 것도, 그것이 모델로 삼은 자연 재료에 비하자면 늘 싸구려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인조의 것을 만드는 재주를 부림으로써, 돈 없는 사람들도 그럭저럭 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너무 쉽게 소비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자연을 죽이고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통나무인 척하는 가짜 통나무집은 몇 십 년 못 가서 수명을 다하고는 땅에 묻힐 것이고, 그것이 묻힌 땅에서는 정작 통나무가 자랄 수 없을 것이다.

해마다 계절이 바뀌면, ‘척’을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통하지 않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늘 부끄럽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척’을 하면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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