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엥의 역동적인 문화공간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기자페이지

파리지엥 생활 공간에서 삶과 예술은 분리돼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하나를 말하고 하나이어야 하며 하나일 수밖에 없다. 부드러운 크로와쌍에 진한 엑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회색 빛 하늘아래 하루를 여는 카페는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는 기능적 장소가 아니라 지성과 문화의 중심공간이다.

필자에게 유럽 정체성의 근본은 역동적인 문화공간을 통해 ‘보고 느끼고 재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인식됐다. 유럽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는 수백년 전통이 살아있는 ‘카페 (Cafe)’라는 특수 문화 공간이 시민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영국의 퍼브(Pub), 독일의 호프는 파리의 카페만큼 창조적이며 풍요로운 일상공간은 아닌 것 같다.

1654년 남 불 막세이유에 처음으로 카페가 생긴 이후 파리지엥의 카페는 문학, 예술, 사상과 지성 등의 산실로서 명소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1674년 이래 100여년동안 파리 중심지 6구에 있는 쌩 제르맹 데 프레 지역을 비롯, 약 900여곳의 카페가 파리지엥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1682년 문을 연 ‘프로코프’라는 카페는 볼테르, 라신느, 루소 등이 단골손님이었고 역사 깊은 ‘레 되 마고’ 카페는 쌩 제르맹 데 프레 성당 옆에 있는데 피카소와 브라크가 큐비즘을 탄생시킨 창조적인 공간이며 20세기 초 실존주의 철학가인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사상적 공간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대 문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랭보,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 언어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각계 명사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90년대 이후에 파리 바스티유를 중심으로 20여곳의 철학 카페까지 등장했다. 평범한 카페를 그들의 사상과 예술, 문학 ,철학 등을 토론하는 깊이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파리지엥의 저력은 무엇일까?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비틀(Beetle)은 하나의 상자를 뜻한다.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상자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상자를 볼 수 없다.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 의미는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당신의 생각이나 머리 등에 들어 있는 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문화 예술 공간이 반드시 대규모 미술관과 갤러리란 법은 없다. 사고의 전환과 발상 등에 따라 사소한 공간도 멋지고 품위 있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막셀 뒤샹이 남성용 변기를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 권력화돼 가는 미술관의 행태를 고발하고 작가의 컨셉의 중요성을 일깨웠는데 이에 대해 앙드레 브르통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기성품도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파리지엥들의 역동적인 문화공간은 열린 사고 방식 위에 존재한다. 단적인 예를 들면, 파리 막셀 뒤샹 거리에 있는 필자의 집 근처 1층에 한 건축 사무실이 있는데 창문 옆 벽에 전신 누드가 별 문제 없이 걸려 있다. 지난해 한국의 한 공무원이 필자에게 “공사는 문화공간이 아닙니다. 굳이 공사가 아니더라도 문화공간은 많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경직된 공사의 사내 조직이 예술행사로 부드러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예술은 미술관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

도시의 작은 카페 공간조차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활용하여 품격 있는 문화로 창조해내는 파리지엥의 사고방식을 우리와는 먼 나라 이야기로 외면할 게 아니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들의 사고가 그들의 탄력 있는 문화의식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어야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